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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Oct 10. 2024

잊기 위한 노력은 잊지 못한다는 증거

10년의 짝사랑(11)


무언가를 잊기 위해 노력한다는 말은 결코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란 말과 같다.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것을 사무치게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다. 신의 축복이라고도 불리는 인간의 망각은 편리한 만큼이나 이루기 어려운 일이다. 충분한 시간만이 그 축복을 향유할 유일한 방법이다.


그녀를 잊겠다고 연락을 끊은 지 3년이 지났으나 망각의 축복을 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여전히 그녀를 잊기 위해 ‘노력’ 중이었고, 당연하게도 좀처럼 진전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재활을 열심히 하거나 인생을 열심히 살지도 않았다. 그저 시간이 흐르는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길 뿐이었다. 다행히 수술 부위는 점차 좋아졌고, 걷고 뛸 수도 있게 되었으며 통증도 사라졌다. 가끔씩 불편함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일상생활에는 대체로 문제가 없었다. 대학을 졸업했고, 1년 동안 교사 임용 시험을 준비하겠다며 허송세월했다. 이후 집안에 생활비가 부족해지면서 어떻게든 돈을 벌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그나마 일자리를 구하기 쉬웠던 학원에 취직해 최저시급 수준의 박봉을 받으며 밤낮 주말 없이 일했다. 그러다 우연히 프리랜서 기자로 일할 기회가 생겨 학원을 그만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취재 차 지방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하필 그곳은 그녀의 고향이었다.


그녀와 연락은 끊어졌지만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만큼 대강 어떻게 살고 있는지는 친구들에게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녀도 대학을 졸업했으며, 취직 시험 준비를 하느라 고향에 내려가 있다고 했다. 그러니 출장지를 들었을 때부터 심란한 마음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녀를 잊겠다는 3년의 노력이 무색하게 그날 이후 계속 그녀 생각에 빠져 지냈던 것이다. 


그녀의 고향으로 출장을 갔을 때는 4월 중순이라 거리에 벚꽃이 만개해 있었다. 한 대학교에서 취재를 마치고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기다리는데, 제법 포근해진 바람에 분홍 꽃잎들이 눈 내리듯 흩날렸다. 아름다운 캠퍼스와 벚꽃이 자아내는 봄날의 향기에 취해 나는 어느새 휴대전화를 꺼내 들어 그녀의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그녀를 잊겠다는 다짐은 이미 출장 전부터 깨져 있었다.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으니 3년의 시간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설렐뿐이었다. 결국 후회하게 될 것을 알았지만, 하지 않아도 후회이고 해도 후회라면 그녀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한참의 신호 끝에 전화를 받은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녀의 부드러운 음성은 전처럼 따뜻했는데, 3년이라는 시간 동안 한층 성숙해진 느낌이 더해져 그런지 조금은 다르게 들렸다. 그녀의 고향에 출장을 와 있어 전화를 걸었다고 했더니, 역시나 그녀는 얼굴을 보자고 했다. 평소에도 이유 없이 나를 포함해 친구들을 만나러 다니곤 하는 외향적인 그녀였기에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날은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급하게 기사를 송고해야 해서 PC방에서 밤을 새워야 하니 다음날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녀는 내가 무리하는 것 같다며 걱정을 하면서도 수험 생활이 지겨웠는지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렇게 꼬박 밤을 새우고 다음날 아침 그녀를 만났다. 한 손에 나를 위한 카페인 음료를 들고 나타난 그녀는 수험생 다운 가벼운 차림이었는데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편안하고 수수한 차림이 앳되고 순수한 얼굴과 잘 어울렸기 때문에, 나는 애써 꾸민 모습보다 그런 그녀를 더 좋아했다. 


그녀를 만난 순간 밤을 새운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명료해졌다. 우리는 밥을 먹고 카페를 가고 영화를 보고 산책을 하며 종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 행복한 하루가 지나고 나면 여느 때와 같이 극심한 열병에 빠져 비참한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고통을 감내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꿈만 같은 하루를 보낸 뒤 서울로 올라가는 버스에 앉아서야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항상 그녀를 생각하며 듣던 노래를 들으며 단잠에 빠졌다. 꿈속에서 그날 하루를 다시 한 번 보냈다. 우리는 손을 잡고 걸었고, 포옹을 하고 입을 맞추었다. 눈을 떴을 땐 차가 꽉 막힌 서울에 도착해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시커먼 도시가 날 비웃는 것 같았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기에 꿈이라는 쓸쓸한 생각도 잠시, 조금이라도 더 꿈을 이어 나가고 싶어 필사적으로 잠을 청했으나 허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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