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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Oct 14. 2024

10년 만의 고백

10년의 짝사랑(12)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을 때, 더 잃을 것이 없을 때, 어떤 선택을 해도 결과가 다르지 않을 때, 우리는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선택이라기보다는 강요에 가깝다. 그래서 정상적인 판단이 불가능하며 그로 인한 행동에는 많은 것이 결여된다. 그저 행위 자체에만 매몰되어 더 나은 선택지나 방법이 있음에도 인지하지 못한다. 이렇게 상황에 의해 강요된 행동은 대개 결과가 안 좋기 마련이며, 그 책임은 오롯이 본인에게 있다. 


나는 10년 동안 여러 이유로 그녀에게 고백하지 못했다. 그녀가 내게 너무 과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에, 내게 여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수험 생활을 방해할 수 없어서, 고백 후 멀어지며 그녀를 슬프게 하는 많은 남자인 친구 중 하나가 될 수 없어서, 내 모습이 너무 초라해서. 스스로는 그녀를 위한 배려였다고 위안했지만 그저 용기 없는 자의 핑계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무 잘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 싫었던 이유. 그녀에게 난 친구에 불과하며 내 고백은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 고백을 해 봐야 거절당한 뒤 더 이상 친구로도 지낼 수 없으니, 그녀를 볼 수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그녀와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도 없을 거라는 두려움. 짝사랑의 딜레마. 고백 한번 하고 그녀와 멀어지느니,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지켜보며 짝사랑을 이어 가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 여겼다.


그러나 이 선택에는 어려서 몰랐던 치명적인 결함이 있었다. 난 여성인 친구들이 많은 편이었는데,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과 결혼을 거치면서 그 수는 급격히 줄어갔다. 그저 연인이 생기기만 하더라도 예전 같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녀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보다 진지한 만남을 가질 나이가 되었고, 그런 상대가 생긴다면 우리의 관계도 점차 소원해지다가 결국 걷잡을 수 없이 멀어질 것이 분명했다. 즉, 고백을 하건 말건 어차피 벌어질 일이었고, 그걸 인지한 순간 나는 궁지에 몰렸다. 


결국 숨겨온 마음을 어떻게든 전하기라도 해야 평생 후회에 시달리지 않을 거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이런 생각은 마침 그녀가 모든 시험을 마치고 자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떠올랐다. 내 고백이 특별히 그녀를 방해할 일은 없었다. 고백으로 친구 관계가 깨어짐으로써 그녀에게 상실감을 주고 말 거라는 걱정도 이제는 거부감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나 말고도 다른 친구들이 얼마든지 많았다. 그녀에게 내가 그리 특별하지 않다면, 멀어지는 슬픔도 별 것 아닐 터였다. 결과와 상관없이 그저 10년 동안 간직해 온 마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그녀가 알아주기만 한다면 그걸로 될 것 같았다. 무엇보다 미련과 집착으로 점철된 이 짝사랑을 끝내야만 내 다음 인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무려 10년이 지났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고등학교 1학년 시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만 어른이 되고 싶었고, 그래야만 했다. 


쌀쌀했던 12월 어느 날, 그녀를 만나 뮤지컬을 보고 식사를 하고 산책을 했다. 그러는 동안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고등학생 시절의 해맑은 표정과 순수한 눈빛이 여전했다. 몇 번씩 나를 구원했던 그녀의 빛은 내면으로부터 발하는 것이었기에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게는 마지막일 가능성이 컸으므로 그녀와 보내는 매 순간은 어느 때보다 더 소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작별까지 몇 정거장만 남겨두고 있었다. 어떤 말로 고백을 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사귀자거나 마음을 받아달라는 말은 내 의도가 아니었다. 그저 마음을 전하기만 하면 됐다. 그녀를 바라보지 않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좋아해. 그녀는 말이 없었다. 내가 널 계속 좋아해도 될까? 난 그녀에게 짝사랑에 대한 허락을 구했다. 특별한 용기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지겹게도 억누르고 있던 말이 더 이상 미련을 채우지 못하고 흘러넘쳐 나왔을 뿐이었다. 용기가 아닌 체념의 고백이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지 않고 있었지만 당황했을 표정이 눈에 선했다. 한참이 지나고 그녀는 입을 열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없네..." 잠시 후 우리는 어색한 인사와 함께 헤어졌다. 10년 동안 감추어 왔던 마음은 그렇게 볼품 없는 고백과 함께 주워담을 수 없는 몇 마디 말이 되어 흩어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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