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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북극개 Oct 17. 2024

10년 짝사랑의 끝

10년의 짝사랑(13)

고백 이후 그녀와의 연락은 끊어졌다. 10년을 기다린 고백은 상상했던 것처럼 후련하거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간 쌓아 온 마음의 탑이 한순간에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다. 이전에는 그 탑에 올라 그녀를 마음껏 바라보며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고백 후에는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너진 탑의 잔해 위에는 허무와 상실감이 자리 잡았다.


연애를 끝내고 일상을 회복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듯, 짝사랑도 마찬가지다. 나의 경우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 시간을 적극적으로 극복해 보려고 몸부림쳤다. 운동을 하고, 피아노를 치고, 친구들을 만나고, 게임과 영화에 빠지기도 했다. 심지어는 예전부터 소개팅을 주선해 주고 싶어 했던 선배에게 연락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어느 순간 모든 것이 의미 없다고 여겨질 만큼 극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입맛이 없어 식사를 거의 못하자 나날이 수척해 갔고 몇 주 만에 체중이 5kg 이상 줄었다. 틈만 나면 침대에 누워 오지도 않는 잠을 청하고 또 청했다. 잠이 들면 그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가끔은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꿈을 꿀 수도 있었다. 다만 그런 꿈에서 깨고 나면 슬픔은 배가 되어 돌아왔다.


잠을 자지 않을 때는 세상이 끝나버리기를 바랐다. 갑자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져 모든 게 종말을 맞는 상상을 반복했다. 심할 때는 침대 위로 커다란 단두대 칼날이 떨어져 순식간에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상상 속에서 세상이 수천번 종말하고 칼날이 수만 번 떨어지기를 반복하던 어느 날, 한 고등학교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녀와 함께 송년회 겸 저녁을 먹고 있다며 나를 불러냈다. 그녀는 나와 마주하기를 바라지 않았을 텐데. 내가 고백했다는 사실을 털어놓기 불편했을 테니 친구가 날 부르는 것을 하는 수 없이 놔두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난 전화를 끊기 전부터 외출 준비를 했다. 여느 때와 달리 그 어떤 고민이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섰다. 그저 그녀를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식당에 도착한 내게 그녀는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어색한 표정을 모두 감출 수는 없었다. 동시에 그녀의 얼굴에서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이 읽혔다. 나름 열심히 치장을 했지만 초췌함은 감추어지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했다는 게 오히려 더 미안해 애써 밝은 척을 했다. 친구와 큰 소리로 떠들고, 잘 지내고 있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럼에도 어두운 낯빛이 감추어지지 않을 때는 술잔을 비우고 한 병을 더 시켰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니 술병은 세기 힘들 정도로 쌓였다. 그렇다고 주정을 하거나 우울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 추억과 사는 이야기들을 하며 겉보기로는 더없이 즐겁고 의미 있는 송년회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밝은 척하는 모습이 오히려 나를 더 위태로워 보이게 하는 듯 그녀는 시종일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어느새 식당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고, 그제야 대중교통이 모두 끊겼다는 걸 알았다. 우린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았다. 그녀를 태워 보내고, 나는 친구 집에서 자기로 했다. 그녀가 택시에 탄 직후,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갑자기 택시에 올라타 그녀 옆에 앉았다. 당황하는 그녀를 애써 무시하고 친구에게는 그녀를 데려다주고 집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택시는 숨죽인 채 추운 새벽 거리를 달렸다. 이번에도 행동이 생각을 앞섰을 뿐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저 늦은 밤 귀갓길이 걱정되었고, 그걸 핑계로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그녀와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었다.


그녀 집 앞에 도착한 우리는 잠시 마주 보고 어색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추운 겨울 새벽, 자신에게 고백을 했다 차인 남자에게 감히 먼저 작별의 인사를 건네기에는 그녀의 심성이 너무 여렸다. 한참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먼저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 걸었다. 극심한 추위에 옷을 싸매고 걷다가 문득 답답한 마음에 걸음을 멈췄다. 그대로 헤어질 수는 없었다. 아직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도 많았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집으로 들어오라며 호수를 가르쳐 주었다.


그녀가 살고 있던 원룸은 그녀처럼 따뜻하고 아늑했다. 형광등 대신 은은한 노란색 조명이 켜져 있었고, 큰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도시 야경의 불빛이 연말의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녀는 별다른 말 없이 이불을 들고 소파를 가리켰다. 나도 말없이 외투를 벗어 놓고 소파 위에 올라가 앉아 이불을 끌어안았다. 그녀가 조용한 클래식 음악을 틀었다. 감미로운 소리와 따뜻한 공기, 포근한 이불속에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눈을 떴을 땐 여전히 한밤중이었다. 음악도 조명도 그대로였다. 그녀는 침대에 누워 있었고, 소파와 거리가 꽤 있었던 데다가 조명이 있지만 어두워서 눈을 뜨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자고 있느냐고 묻자 그녀는 음악을 듣고 있다고 대답했다. 더 잠을 잘 수는 없었다. 꼭 해야 할 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나는 너를 10년 전부터 좋아했어." 어두웠지만 그녀가 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를 처음 보았던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 글에 써 왔던 내용들을 하나하나 풀어놓았다. 그녀는 최소한의 반응을 보이며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마치자 침묵이 이어졌다. 감미로운 클래식 음악만 따뜻한 방 안을 흘러 다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보랏빛을 띠던 하늘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길거리에 차들이 많아졌고, 성질 급한 한 운전자의 경적 소리가 정적을 깼다. 그만 가 봐야겠다고 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첫 차가 운행을 시작했을 시간이었다. 그녀도 말없이 일어나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그녀와 마주 보고 서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의 눈엔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 그녀도 살포시 손을 올려 나를 안아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는 나를 위로하는 의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쏟아지려는 눈물을 겨우 참고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뒤 길거리로 나왔다. 아직 새벽이었지만 전날의 추위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햇살은 따사로웠다. 아직 내 품에 남아있는 그녀의 온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녀에게 연락이 올까? 온다면 우리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잠시 설레는 상상에 마음이 들떴으나 깊은숨을 삼키며 여태 날 미련과 집착으로 몰아넣은 헛된 망상을 꾹꾹 밀어 넣었다. 들이마셨던 숨을 내쉬자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그 안에 가득 들어차 있던 10년의 회한은 새해의 따스한 햇빛에 흩어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는 내 고민거리가 아니었다. 선택은 그녀의 몫이었다. 난 그저 길고 길었던 짝사랑을 후회 없이 마무리했다는 데에 만족했다.


그리고 지난 10년을 돌이켜 보았다. 그녀를 혼자 사랑했던 그 시간들은 내게 어떤 의미였던가. 그녀의 찬란하고 따스한 빛은 어둠에 갇혀 있던 나를 비추어 구원해 주었고, 평생 기억에 남을 행복한 추억들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때로는 그 빛이 만들어내는 그림자에 묻혀 아파하기도 했다. 비록 행복했던 시간보다 아프고 괴로웠던 시간이 더 길었지만, 그러한 모든 시간들은 의미를 찾을 수 없던 내 인생 속에서 나를 나로 존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녀는 그 어떤 향취도 느껴지지 않는 흑백 사진에 불과했을 내 인생에 다양한 색을 입혀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까지 정지된 사진과 같은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 지난한 짝사랑에 얽매여 10년 동안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나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모든 말들을 쏟아낸 그날, 비로소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그제야 알았다. 항상 나를 향해 주기를 바라며 갈망해 왔던 그녀의 빛은, 내가 아닌 내가 나아가야 할 길을 비추어 주고 있음을. 그리고 그제야 그것이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는 것도 알았다. 눈이 부셔 바라보기 힘든 빛이 아닌, 나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은은하고 부드러운 빛이 그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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