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의 짝사랑(8)
짝사랑이 장기화되는 이유는 보통 고백을 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거기에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난감한 상황은 상대와 특별히 친한 친구가 되어버린 경우다. 친구 사이에 고백을 해서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대부분 친구 관계까지 깨지며, 이는 짝사랑하는 사람은 물론 짝사랑을 받는 사람에게도 큰 상실감을 주기 마련이다.
그녀가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온라인 메신저를 통해 전보다 더 많은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난 거의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그녀가 메신저에 접속하기만을 기다렸다. 온라인 상태가 되면 어떤 얘기로 말을 걸어야 할지 고민했다. 메시지를 한 줄 보내고 나서는 답장이 오기를 기다렸고, 답장이 오면 어떻게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갈 수 있을지 고심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가 고민이 있다면서 남자인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녀와 가까운 친구였는데, 그녀를 이성으로 좋아하고 있었으며, 무려 열 번을 넘게 고백을 했다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녀가 그 모든 고백을 거절했다는 것. 좋은 친구이고 좋은 사람이지만 자신의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사귈 생각은 없다고 했다. 그녀는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나무였던 셈이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을 연애에 적용하면 범죄가 된다는 사실을 요즘 사람들은 대개 알고 있지만, 그때는 그렇게 끈질기게 고백하는 것을 끈기와 열정, 그리고 사랑의 척도로 보아주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거절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주변의 남성 친구들이 자꾸만 고백을 해서 친구를 잃어버리는 것이 슬프고 괴롭다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세 가지 이유로 그녀에게 고백할 마음을 접어야 했다. 첫 번째로 그녀 주변의 숱한 남자들처럼, 그녀의 친구였다가 고백을 하고 멀어짐으로써 그녀를 마음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는 내가 그녀의 취향이 아님을 확신하고 있었으니, 열 번 찍어도 꿈쩍하지 않는 그녀의 단호함으로 보건대 나에겐 가능성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마지막 세 번째는 나 역시 그녀를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 인생에 처음 빛이 되어 주었고 멀리 있지만 떠올리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녀가 가능성 없는 욕심 때문에 영영 타인이 되는 것은 결코 원치 않았다.
남녀 관계는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언젠가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가까웠다가, 한 순간 세상 그 누구보다도 멀어진다. 이는 이별하는 연인은 물론, 고백했다 거절당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녀를 잃을 용기가 없었고, 그러니 결과가 당연한 일은 시도하지 말아야 했다.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했고, 그 안에는 ‘나는 네게 그런 사람이 되지 않으리라’는 무언의 약속도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 걸음 더 가까워졌고, 그럴수록 그녀를 얻고 싶다는 생각으로부터는 한 걸음 더 멀어져야 했다.
이후 나는 그녀 앞에서 감정을 숨기기 위해 더 신경 써서 노력했다. 겉으로는 그저 친한 고등학교 동창에 불과했으나 속으로는 혼자서 요동치는 감정들을 견뎌냈고, 그렇게 그녀 앞에서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는 일은 습관이자 태도가 되어 버렸다. 그녀와 시간을 보낼 때마다 마음속에는 수 만 가지 감정이 휘몰아쳤으나 겉으로는 더없이 태연자약했던 것이다. 결국 이는 짝사랑이 오랜 시간 짝사랑으로만 멈춰있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