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중이었다. 반대편에서 엉덩이가세숫대야만 한 외국인이 길을 건너오고 있었다. 서양인 여성은 엉덩이만 컸지 키도 크고 날씬한 몸매에 전체적인 스타일도 멋있어 보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며 스치는 찰나의 순간에 타인을 판단하는 에고가 고개를 쳐들었다.
'엉덩이만 저렇게 큰 비대칭의 옷은 어디서 샀을까?'
엉덩이가 들어가는 몸에 딱 맞는 스키니 청바지가 신기해 보였다. 에고는 잽싸게 이 순간을 캐치하고는 수다 한 판을 벌이려 든다.
‘저런 사람들은 옷을 맞춰 입는 거겠지?, 엉덩이가 크지만 잘 꾸몄네, 저렇게 완벽하게 꾸밀 에너지로 저 엉덩이 살은 왜 못 뺄까?, 하루에 3시간만 걸어도 엉덩이가 반으로 줄 텐데, 그러면 더 예뻐질 것 아니야?’
나의 에고는 타인을 제멋대로 판단하며 아무 말 대잔치를 벌이려던 참이다.
상황을 눈치챈 내가 생각을 멈추자.
예상대로 곧이어 뒤따라오는 사람까지 ‘몸에 문신 좀 봐’라며 판단의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의 관심을 사로잡으려고 다른 소개거리를 끌어들이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애를 쓴다.
이 모든 생각이 3초면 끝이다. 6초를 그냥 둔다면 에고의 수다에 휩쓸려 들어가 빠져나오기 힘들어질 게뻔하다. 의미 없는 생각에 장단을 맞추다 보면 하루에 쓸 에너지를 금방 소비해 버려 피곤한 하루를 보내게 된다.
내가 알고 있던 대처 방법은 떠오르는 생각을 '억압'하는 것뿐이었다. 에고는 인정해 주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잘 알지 못할 때였다.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쯤으로도 에고의 말에 대꾸해 주고 마무리를 맺었어야 했다. 대화의 끝맺음을 못한 생각은, 끝없는 숏폼 콘텐츠처럼 틈만 나면 떠올라 머릿속을 공회전시킨다.
내가원치 않는 생각이라 판단되면, STOP을 외치듯 머리를 흔들고 부정으로 ‘억압’하고는 했다. '억압'된 생각 덩어리는 더 커지고 무거워진 걱정으로 나에게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나를 짓눌러 숨 막히게 했다.
이제는 '억압'의 부작용을 알았으니 책에서 배운 데로, 걱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에고 수다 처리법’을 쓴다.
1. 걱정 발생 -> 나이가 들면 신진대사가 떨어져 똑같이 먹어도 뚱뚱해질 거야
2. 걱정 인지 -> '뚱뚱이 걱정'이 들어왔구나
3. 걱정 인정 -> '뚱뚱해 질까 봐' 걱정하는구나
4. 걱정 표현 -> 살이 찔 수도 있지, 그럼 빼면 되지 ( 대수롭지 않게 )
5. 걱정 떼내기 ->일어나지도 않은 일이잖아?
걱정의 대부분은 일어나지도 않은 에고의 소설이었고, 나는 그 소설에 휘둘려 우울증이라는 늪에 빠져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에고 생각 처리법을 적용하지 않았더라면, '뚱뚱이 걱정'에 사로잡혀 저녁을 굶은 나는, 새벽에 치킨과 맥주를 시켜 먹고 꿈에서 엉덩이가 세숫대야 만 해져 고통받았을지도 모른다.
요즘은 길을 걷다가 나의 일곱 살 에고가, 앞에 걸어오는 사람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면 잽싸게 시선을 하늘로 돌린다. 그러고는 파아란 하늘에 두둥실 떠있는 구름 모양 맞추기를 시작한다.
내가 ‘저건 토끼야’라고 시작하면 에고는 ‘무슨 토끼야 사슴뿔 같은데 ‘라며, 참견할 주제를 바꿔서 휙 던져준다. 나와 에고는 판단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함께 구름 모양 맞추기에 몰입한다.
하루에도 셀 수도 없을 만큼, 에고와 나는 이런 줄다리기를 한다. 가끔은 쉴 새 없이 떠드는 나의 에고를 한데 쥐어박고도 싶지만, 나의 한 측면이자 평생의 동반자인 에고가 요즘은 예전보다는 훨씬 협조적인 것 같다. 생각에도 쉼표가 생겨서 그런지, 아무것도 안 하는 시간이 길어져 몸도 마음도 편해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