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물음표 Jul 23. 2024

힘들어서 정신과에 갔다. 상식이 무너졌다.

고등학생 때였다. 심각한 가정폭력에 시달리고 있었다. 공교육을 거치면서 온갖 학대를 당한 부작용으로 몸과 마음이 한계까지 망가져 있었다. 잊어버리고 싶었던 고통들이 끔찍한 이미지로 돌아와 자신들을 외면하지 말라고 시위하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면 고통에서 탈출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입시에 매달렸다. 학교에서는 어떻게든 멀쩡한 척했다. 성적도 높게 유지했다. 조금이라도 가면을 벗으면 입시에 실패해서 더 좌절하게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버텼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아파도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싶었다. 정신과에 가면 힘들 때 도움을 받아서 건강해질 수 있다고 배웠다. 그래서 반대하는 부모를 설득해 치료를 시작했다. 그런데 돌아온 건 나를 낭떠러지에서 밀어버린 학대였다. 충격으로 20살 이전의 기억이 거의 날아갔고 의료체계에 대한 신뢰가 사라졌다.


예전에 내가 그랬듯이 힘들 때 정신과에 다니면 무조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안 간다는 사람을 억지로 보내는 게 도와주는 길이라고 믿는 사람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정신과는 환자의 인권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지도 않고, 치료받으러 온 사람에게 필요한 도움을 준다는 보장도 없고, 나처럼 큰 피해를 보는 사람도 있다. 피해자들이 목소리를 내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피해자가 없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누군가 이 글을 읽고 혼자가 아니라는 확신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내 고통을 비웃던 의사

끔찍한 고통 때문에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대화하기도 힘들었다. 지능이 크게 떨어졌다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데도 정신과 의사는 고등학교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내 고통을 철저하게 부정했다. 의사 말로는 우울증 환자들은 성적이 크게 떨어지는데 나는 성적을 유지할 수 있으니 우울증 환자가 아니란다. 못 견디게 아프다고 아무리 말해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도 우울증 진단조차 받을 수 없었다. 이때 제대로 된 진단을 받지 못하고 끔찍한 경험을 해서 지금까지 미등록 장애인으로 살고 있다.


"기준이 높아서 아픈 거다"

“증상이 심하지 않은데 주관적인 불편감이 크다" (다 엄살이라는 말을 격식 있게 표현한 걸까)


진료받으러 갈 때마다 들었던 말이다. 아픈 와중에 노력해서 원하는 것을 얻었다는 이유로 내 고통을 부정하는 의사의 언행이 나를 절망으로 몰고 갔다. 어떻게든 노력해서 꿈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가 부서지기 시작했다. 노력해 봤자 고통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찼다. 나중에는 "잘하고 있다"는 의사의 헛소리에서 벗어나려면 내가 손을 놓고 무너지는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에까지 시달렸다.


어찌어찌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다. 두 다리 건너서 들은 "역시 넌 천재"라는 말이 그렇게 달콤했다. 하지만 이때를 기점으로 완전히 무너졌다. 머리가 아예 돌아가지 않았다. 치매에 걸리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기억력이 떨어졌다. 5초도 집중하기 어려웠다. 집과 정신과 양쪽에서 심한 가스라이팅에 시달린 여파로 현실 감각이 꼬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맞는 것 같으면서도 틀린 것 같았다. 사실이라는 게 뭔지도 헷갈렸다.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나도 고통이 시간과 체력을 죄다 훔쳐가서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어려서 학대로 고통받은 것도 모자라 10대 후반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몸과 정신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억울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신과 의사에게 학대당해서 상태가 더 나빠질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도 못했다. 견딜 수 없어서 그만두고도 내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몰라서 몇 달 동안 아무것도 못 하고 헤맸다.


정신과에서 끔찍한 경험을 했다고 말해도 애써 부정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봤다. 누가 정신과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 경험을 약간이라도 밝히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이런 반응이 나온다.


“여러 군데를 다녀보면서 맞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해봤는데 결과가 이렇다)

“안 다니면 위험하다” (환자 인권을 무시하는 치료가 더 위험한데?)

“그룹 상담이라도 받아봐라” (앞으로 정신과 의사가 주도하는 활동에 참가할 생각 없는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정신과 치료를 거부하는 것조차 치료가 필요한 증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단호하게 거절하고, 이유까지 밝혀도 "무조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우기는 사람과는 대화할 수 없다. 자신의 독단만 강요하는 사람은 나를 소통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를 받다가 오히려 큰 피해를 본 독자가 있다면,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혹시 주변에 당신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믿지 마시라.


반대로 정신과 의사, 심리상담가, 기관 관계자 등이 내 글을 읽는다면 환자를 모든 면에서 동등한 사람으로 대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어떤 이유로든 환자에게 피해를 주었을 때 책임지고 본인 행동을 고친 적 있는가? 치료라는 명목으로 사람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본 적 있는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