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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it Oct 07. 2024

진정한 자기치유

눈부신 안부를 읽고 - 백수린


1.

 작중 해미는 언니가 죽은 과거의 나쁜 기억으로 자기 부정, 억압된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자기 상실적 삶 속에 있는 해미는, 사실 바깥을 향해 ‘도와 달라’는 신호를 발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해미를 구출해 내는 것은 결론적으로 연민과 사랑이다. 

그런데 해미는 ‘선자 이모 첫사랑 찾기’를 통해 오인된 자기 치유법을 깨닫는다. 

그것은, 진정한 자기 회복은 제대로 된 기의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호소에 둔감하다. 타인의 고통을 진실이 아닌, 다른 대체물로 덮는 경향도 강하다. 그런데 그 아픔을 치유하는 것은 망각도 있겠지만, 근원적인 것은 주체가 되어 능동적 자기 치유, 자기 회복에 이르는 것이다.      

2. 

 기억은 과거에 대해 어떤 사실이 있었음을 떠올리는 것이다. 좋은 것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기억은 자신을 예전으로 돌려세우며, 현실이란 시선으로 더욱 미화하거나 악화시키기도 한다. 만약 그것이 좋지 않은 기억이라면 마음속에서 지우기 위해 갖은 애를 쓸 것이다. 여전히 남아서 괴롭히는 과거는 일상에서 기억으로 소환될수록 이를 부정하는 몸짓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작중의 해미는 이런 차원에서 가스 폭발 사고로 죽은 언니에 대한 죄책감으로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거나, 별일 없다는 신호로 자신을 위장하던 것이다. 잊을 수 없으면 그것에 대체되는 것을 통해 그것을 일종의 치유책으로 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을 인정하지 못하는 부정성에서 나오는 것이다. 혹은 그런 정도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타인의 기억에 얹어 억압된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자기 상실적인 내면의 아픔을 갖고 있는 해미는, 사실은 바깥을 향해 자기 회복으로 도와달라는 호소를 하고 있는 것이다.‘해미'라는 이름은 바로‘Help me'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미국식 영어 발음과 유사하다) 그러한 요청에 나타나 그녀를 돕는 주변인들로서는, 해미 이모, 파독 간호사 출신 이모들, 친구인 레나와 한수 등이 등장한다. 이들을 거쳐 해미는 자기 회복을 이루고, 마침내 거리를 두며 주위를 떠돌게 만든, 우재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고 할 것이다.      

 물론 해미를 구출해 내는 것은 결론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다. 그런 과정의 전면모를 보여주는 것이 작품 속에서 나타난다면, 그것은 선자 이모의 첫사랑 찾기를 통해 그려지고 있다고 본다. 다만, 해미는 K.H라는 인물을 찾는 과정에서 그 어려운 행로만큼이나 자신을 치유하는 방식에서 계속 어긋난 길을 따라 헤매는 모습을 보인다. 우선, 해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선자 이모의 첫사랑 K.H를, 여러 가능성 있는 이름과 당연히 남자일 것이란 생각으로 접근하는 것이 그것이다. 해미는 그의 이름이 아마도 기호일 것이라는 잠정적 결론에 이른다. 여기서 첫사랑 기호는 바로‘기호(sign)’를 암시한다고 생각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데 기호(sign)는 그 자체로 텅 빈 것이다. K.H는 경호, 기한, 국환, 심지어 국희 등 어떤 명칭을 대입해도 상관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그 인물은 아마‘기호'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일 것이란 생각이 오류를 강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부진정한 자기 회복을 위한 몸짓이다. 즉 기호(sign)는 다름 아닌,‘기표+기의'로 이뤄져 있는 데, 해미는 기표에만 의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인을 불러일으키는 K.H는 자꾸만 기의에서 미끄러져 진정한 기의를 찾지 못하고 엉뚱한 추측만 낳게 하는 것이다. 결국에는‘천근호'라는, 남자같은 이름을 가진 여자로 밝혀진 것이 반전을 이루기는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 해미가 어떤 방식으로 진정한 자기 인정으로 나아가야 하는 지를 제시하는 것이다.     

3.

 "무라마쓰 군은 올해 4월부터 괴로움을 호소하다 지난달 하순에는‘사는 것이 이제 피곤해지는 것 같다'라고 죽음을 암시했으나 담임은‘왜 그러니?, 시험이 걱정되니?',‘힘내서 생활해라'라고 반응했다.

그는 지난달 29일, ‘내가 언제 사라질지 모르겠다 (중략) 이미 죽을 장소가 정해졌다'라며 마지막으로 호소했으나 담임교사는‘내일부터 (예정된) 연수를 즐기자'라고 무라마쓰 군의 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답글을 남겼다.”(2015.7.9. 연합뉴스)

 위의 내용은 2015년 일본에서 발생한, 집단 괴롭힘에 의한 비극을 전하는 보도 기사이다. 담임선생에게 어떤 상황 판단 오류가 발생했느냐는 문제가 있겠지만 무라마쓰라는 학생의 도와달라는 신호는, 답장 없는 아우성으로만 메아리치다가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나 버렸다.     

 이 작품‘눈부신 안부'는, 해미가 아픈 과거를 치유하고 자신을 인정하며 자기를 찾아가는 성장 소설의 일종이라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사람이라면 누구나 성장 과정에서 성장통이란 걸 앓게 된다. 그 경로에서는 자기 내부에서든 바깥에서든 모두가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를 얻게 된다. 그것이 극복하기 힘든 극한에 이를 때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망각할 최후 수단에 이르기까지 한다. 그래서 마음의 아픔은 망각이 최종적이며 가장 강력한 치유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망각은 긍정적으로도, 또 부정적으로도 작용하는 것이다. 긍정적 시각에서 살피면, 존재가 성장할수록 과거는 지워지고 그래서 망각을 통해 아픔을 치유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망각은 단지 수동적 시간의 흐름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마음을 치유하는 생산적이며, 드러냄으로써 삭제해 나가는 것으로 작동해야 진정한 치유제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더불어, 타인에 대한 공감, 연민으로 함께 아파하며 사랑으로 안을 수 있는 연대감이 덧붙여져야 할 것이다. 이런 능동적 노력이 함께 하는 측면에서 망각이 하나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의 근본 성격은 여전히 소극적인 것이다.      

 이제 자신이 주체가 되는 능동적인 자기 치유, 자기 회복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상처는 그것이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으면, 영원히 치유되지 않고 돌아오는 것이다. 같은 상처로 불리어도, 바깥으로 드러난 상처는 그 위중함의 차이 외에는 눈에 보이는 것이라 손길을 뻗기 쉽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비가시적이라 접근하기 어렵고 무의식의 깊은 곳에 오래도록 남아 삶 자체를 망가뜨리기까지 한다. 

무라마쓰 군 사례처럼, 그 상처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었으면 그의 호소가 없었어도 치료 조치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고통은 혼자 삭이는 것이었고, 이를 간절히 호소하는 소리에도 그것의 제대로 된 의미를 읽지 못한 외면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변엔 그렇게도 많은 해미가 있어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알아본다고 해도 그저 외상처럼 물질적 외피로만 덮어버리려 하기 때문이다. 자식이든 동료 직원이든, 타인의 고통엔 그것의 일시적 치유책인 물리적 치환만으로 덮어버리려는 태도가 만연한다. 고통의 반대인 일시적 위안, ‘왜 그러니, 시험이 걱정되니',‘힘내서 생활해라',‘내일부터 (예정된) 연수를 즐기자'라는 식으로 가려버리는 것이다. 

당장 우리가 접하고 있는 일상에서도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파렴치한이 음주 운전으로 멀쩡하게 길을 지나던 행인을 치어 죽인다. 그런데, 이 피해자 측이 접하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결과이다. 가해자는 갖은 비용을 들여 법적으로 방어하고, 그의 형량을 단 몇 개월의 징역과 몇 년의 집행유예 처분으로 이끌어 낸다. 초범인 데다가, 주변인의 탄원, 신속하게 보증금 납입조건부 구속 정지 제도를 이용한 점 등을 감형 사유로 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도 끝내 공적이든 사적 자리에서든 유족에게는 진정성 있는 사과 한마디를 하지 않는다. 

피해자는 마땅히 금전적 배상을 받아야 하나, 정작 바라는 것은 그게 아니다. 오히려 진실한 사과 한마디면 ‘자식 팔아 돈 버는 짓’이라고 하면서 금전적 배상도 집어 던질 판인데 말이다.     

 우리는 타인의 신호에 둔감하다. 해미처럼 도와달라는 신호를 그럭저럭 감지하는 경우조차도, 무라마쓰의 극단적 행위 암시에도, 아픈 사람의 마음을 진정으로 들여 다 보지 못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당연히 그 상처의 본질을 찾아 치유하는 일에도 무력해진다. 여기서 우리는 ‘기호'를 근호와 오인하며 그를 찾아다니는 것 자체를 타인에 대한 진정한 공감의 탐색 과정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 진실은 여자인 근호이며, 그것이 실재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찾고자 하는 것은 기호였으나 정작 나타나는 것은 근호인 것이다. 그런 아픔의 본질, 진실을 찾는 것이 누군가 도와달라는 호소에 제대로 부응하는, 진정한 자기 회복과 자기 치유를 추구하는 일인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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