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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it Oct 13. 2024

지켜야 할 세계 - 문경민

 갑자기 비가 많이 쏟아진다. 한 손에는 우산을, 다른 쪽에는 공책을 든 상태라 팔을 추스르기가 번잡하다. 그러면서 나무 아래를 지나면 나뭇잎이 반쯤은 비를 막아 줄 것이라는 판단으로 나무가 서 있는 블록 길을 택했다. 그런데 그 아래를 막 지나려는 데 아랫둥지에서 가지가 길게 길 쪽으로 뻗어 있다. 그냥 지나가면 비를 피하기는커녕 몸통을 훑어 윗부분을 적실 것이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진흙탕이 된 옆 통로로 다시 비껴간다. 이 나뭇가지는 내가 도움을 받으려는 것에 비추어서는 분명 장애이다. 하지만 나뭇가지는 전정을 당하지 않고 남아 길을 가는 일에는 방해가 되지만, 나무 자체로는 지극히 정상이며 어디든 팔을 뻗쳐 생명을 확장하고자 하는 몸짓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회적 규칙, 권력, 산업적 효용 등에 따라 선을 긋는다. 모호한 경계를 두고 몸놀림이 둔감하거나 일반적인 생각을 벗어나거나, 남들이 다 눈감고 하는 행동에서 벗어나면 경계 외인으로 취급한다.

그러한 인위적인 기준은 반복을 통해 지속해서 학습된다. 실질적인 부당함, 억압과 폭력이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닌 것처럼.

언어학자 소쉬르가 말하듯이, "발성 기관인 말도 중요하듯이, 정신적이고 심리적인 사고 과정이 동반되었을 때 진정한 언어 활동이 있다." 그런데 현실은 언어를 상실하고 말조차 억압받는 것이다.

우리는 날이 갈수록 말조차 잃어가고 있다. 목소리마저 할당되지 않는 이 현실이지만, 내일이면 나뭇가지가 햇빛을 더 가려줘 지면 온도를 더 낮춰주듯이, 언젠가는 장애와 비장애, 교실에서의 말과 윤옥이 추구하는 언어는 만날 것이다.

그래도 우리에겐 지켜야 할 세계가 있고 그러한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굳이 경계를 넘어, 다른 세계로 진입하지 않더라도, 수호해야 할 세계는 분명 있는 것이다. 시대가 바뀐다고 변하는 것은 아니다. 그 경계를 허무는 고투가 우리가 '지켜야 할 세계'에 있는 것이다.     


1. 질서와 바깥

 작품 속의 정윤옥이 그렇다. 그녀는 말하는 법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이다. 소쉬르 같은 언어학자의 언어를 연구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녀의 갇힌 공간, 제도적 학교에서는 질서의 언어를 가르쳐야 한다. 이것은 기성의 코드와 억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만의 프로그램으로 언어를 가르치려 하지만 기성 질서인 학생이나 학부모의 반발에 부딪힌다. 교육은 수요의 소비일 뿐이다. 그런데도 지호같이 '우우'하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단지 소리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한다. 기성 질서가 억압하는 교육 현장, 더욱이 포스트 모더니즘적 개인 서사로 해체된 오늘날에는 소리조차 설 곳이 없다. 말의 압살과 뇌병변 장애는 그렇게 평행선을 그으면서 오늘의 억압된 현실을 암시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2. 표면의 말과 내면의 언어

 지호를 잘 돌보겠다고 하며 기적의 집으로 데려가는 하성호는 종교인을 가장한 사기꾼이다. 나중에는 박경수라는 허무인으로 위장하는 실체 없는 빈 껍질이다. 그를 통해 나오는 말은 지극히 소리도 아닌 소음인 것이다. 소위 정상인이면서 장애인을 착취하는

비정상인으로 전도되는 것이다. 윤옥의 학교에서는 임원 학부모 회비 같은 것을 걷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런 연유로 윤경은 늘 불이익을 당한다.

학교에서는 정상 교육 과정을 진행함에도 한 해에 150명이 자살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박경수의 감금장에서는 하나같이 지호이고 그리도 많은 지호가 죽임을 당한다.

윤옥이 부당한 금전 거래를 거부하는 것이 정상이다. 굴종 사회에 맞서 항의하는 수연의 행위가 정상이다. 영숙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만큼 비참한 건 없다"라면서 삶을 마감하는 것은 이러한 현실에 저항하는 상징이다. 그렇게 보면 뇌병변 장애를 앓는 지우가 '우우' 거리는 소리가 내면에서 나오는 정상이며 진실한 언어이다. 그런데 세상은 그것들을 비정상이라고 구분 지으면서 정상인들의 표면의 언어로 덮어 가려 버린다. 윤옥은 이런 내면의 언어를 회복하고자 애쓰며, 야학은 이런 언어를 회복하는 곳인 것이다.    

 

3. 경계선에 있는 낯선 ''

 그러나 현실은 이상과 접경 선을 마주하면서도 쉽게 그 경계선을 넘지는 못한다. 이 선상에서는 경계 선상의 존재가 되어 이쪽도 저쪽도 아닌, 포함되면서 배제되고 또 배제되면서 포함되는 정체성 혼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작품을 통해 엿보면, 윤옥은 수연이 내민 가입서에 서명해 전교조에 가담하면서도 직접 조직활동에는 참여하지는 않는다

윤옥의 엄마는 방직공장 전사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지호가 잘못됨을 짐작하면서도 자기 자식을 끝내 기적의 집으로 보낸다. 수연은 저항 기질을 보이면서도 정훈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을 윤옥에게 부탁한다. 정훈은 야학과 학생운동을 한 소위 깨어있는 존재이었음에도 미국 유학 후 대학교수, 인사 비리, 불쌍한 수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 모든 예시는 이상과 현실 간 경계에서 장애와 정상, 순응과 불순간을 뚜렷이 구별하던 것과는 낯설다.     


4. 나를 찾기타자되기

 그런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사회적 억압을 탈피하고 소외와 배제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은 곳곳에서 시사되고 있다.

대표적인 부분이, 10세기 신라 시대 득오실과 득오곡은 ‘마을’이란 뜻으로 같은 말이라고 하는 언어의 종합이다. 즉 그 유래를 따라가 보면, 말로 구분해 놓은 것일 뿐, 분리는 아니다. 장애를 안고 말을 잘 못 하는 사람이나, 비장애인이지만 할 말을 제대로 못 하는 사람 간 차이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성호라는 파렴치한은 지호외에도 다수의 지호를 학대하고 살해한다. 그에게는 a도 b도 다 지호에 불과하다.

이는 점잖은 체하는 그 앞에 있는 장애인들은 모두 걷어찰 수 있는 하나의 돌에 불과한 것이다. 나는 없고 타자는 눈앞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자기 부정에서도, 윤옥은 상현을 입양하고 끝까지 돌봐 줄 것을 선언함으로써 나를 찾고자 한다.

학교에서도 동생과 같은 병을 앓는 시영의 담임이 될 것을 고집함으로써 잃어버린 동생을 회복하려 한다. 학교 수업에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수업하고 부패 고리에서는 자신을 해방한다.          


5. 지켜야 할 세계

 뇌병변 장애인은 정상인과는 다른 그들만의 언어를 사용해 소통한다. 그런데 거기에는 어떤 경우든 여과되지 않은 감정을 전달하며 소통에는 과장이 없다. 하지만 정상인, 그것도 믿음을 가진 사람은 가장 큰 거짓말을 일삼고 있다. 야학과 학생운동, 부끄러움을 이야기하던 정훈은 가장 속물적인 추태를 보인다. 이런 속에서 영숙이 상징적으로 교내에서 자살하고 수연도 무너져 내렸다. 윤옥의 어머니는 하성호를 찾아내어 그에게 응징한 것이지만, 기성 질서에는 엄연히 위반되는 것이다. 이것은 현실 세계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것이지만, 그것은 달리 보아야 할 은어이다. 다름 아닌 '아버지의 법'이라는 사회적 억압을 깨는 상징적 제스처인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지호가 되어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하성호라는 폭력적 질서와 그가 강압하던 말로 소통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제는 '아아' 하면서 그들의 언어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타자였으면서 이제는 모두가 ‘내 이름은 지호’라고 말하는 것이다. 정윤옥이 첫 장면에서 빙판에 미끄러지면서 1년 후 사망에 이르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되지만, 그것은 죽음을 각오하고 본래 언어를 회복하고자 한 그녀의 지켜야 할 세계를 암시하는 것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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