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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생물 선생님 May 23. 2024

방송 담당 교사 정생물

저 방송 업무 관심 없는데요?

신규 교사 때 내가 맡은 업무는 방송 및 학교 홈페이지 관리였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일이지만 컴퓨터를 잘 못하는 나이 많은 은사님을 도와줘야 되지 않겠냐는 이상한 말에 속아 담임도 아닌데 1학년 기획 업무를 약간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 원로 교사가 내가 자기 업무 해주는 걸 고마워하는 줄 알았는데 젊고, 제자였던 내가 하는 게 당연하지 이런 느낌으로 말하는 걸 듣고 절레절레. 신규 때부터 내 일만 똑바로 하면 되지 남의 일은 내가 좋은 마음으로 꼭 해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해 준 고마운 분이라고 해야 할까? ㅠㅠ ㅋㅋㅋ 암튼 우리는 학년 말에 다음 해에 어떤 업무를 희망하는지, 담임은 몇 학년을 희망하는지 업무 희망서를 작성해서 제출하면 회의를 통해 그다음 해 업무가 결정되는데 나는 내가 희망한 업무를 해본 적은 거의 없다. 물론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교무 기획, 학년 기획 정도 희망하면 희망한 대로 업무를 할 수 있었다.


신규 발령받은 학교의 교감선생님은 나의 고1~2 무려 2년간 담임을 맡았던 분이었고, 우리는 교감과 신규교사의 관계, 스승과 제자의 관계 그 어디 중간쯤의 애매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 같다. 교감선생님을 불편해하는 나에게 선생님들께서 교감은 보통 2년만 있다가 가니까 2년만 참으면 된다고 하셨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교감선생님과 첫 학교 4년 내내 같이 근무를 하게 되었다.


방송 및 학교 홈페이지 관리 업무는 그 당시 우리 학교는 수능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렇게 쏀 강도의 업무는 아닐 수 있었겠지만 신설학교이어서 방송 기계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홈페이지를 새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 - 그래서 기존 선생님들께서 선호하셨을 리 없고, 모든 것이 새로운 젊은 신규가 하는 게 적합하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그 업무를 맡게 되었다. 개학 전에 시보기 세팅하기, 홈페이지 개설하기 등등부터 시작하여 신입생이 입학하고 난 뒤에는 하루빨리 방송반 아이들을 뽑아야 했다. 학교의 여러 가지 행사 때 방송반 아이들이 일을 해야 하니까. 교감선생님께서는 방송반 아이들은 아무나 하면 안 된다며 자기도 면접 때 참여하겠다고 하셨다. 그렇게 남학생 3명, 여학생 3명을 엔지니어와 아나운서로 나눠서 뽑았던 기억이 난다.


방송반 아이들은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활동했지만 강당에서 어떤 행사를 진행할 때 실수가 조금이라도 있으면 다른 선생님들께 혼이 났다. 물론 혼이 났다는 표현보다는 다음부터는 그러면 안 된다는 잔소리를 들었다는 표현이 맞겠지. 그럴 때마다 속상했던 방송반 아이들은 담당 교사인 나를 찾아와 행사 진행 잘했을 때는 칭찬 안 해주면서 약간 실수했을 때마다 자기들에게 뭐라고 하는 선생님들이 너무 많다며 하소연했다. 나도 원래 방송이 그런 거야. 생방송 뉴스 이런 거 보면 사고 없이 방송이 나가는 게 기본 옵션이고, 방송 사고 나면 난리 나는 것처럼. 나라도 너희 칭찬 많이 해줄 테니 그런 이야기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나조차도 내가 한 말을 실천에 잘 옮기지는 못했던 것 같다.


교감선생님께서 방송 업무를 맡게 된 제자이자 신규인 나를 방송실로 데리고 가서 "와~ 진짜 모든 기계가 최신식의 좋은 새 기계인데 이런 기계에 관심을 가져봐." 하시는데 속으로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업무도 아니고, 관심이 1도 없는데요?'라고 답했다 ㅋㅋㅋ 물론 겉으로는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지. 이때부터 나는 아주 대단한 스킬을 하나 가지게 되었는데 말하는 사람을 경청하는 자세로 쳐다보면서 쓸데없는 소리 시작되면 한쪽 귀로 그 말을 듣고, 뇌로 보내지 않은 다음 다른 쪽 귀로 내보내는 스킬. 몇 번 해봤더니 이야기 끝나고 나니까 아까 교감선생님이 나에게 뭐라고 말했지? 에라 잘 모르겠다 ㅋㅋㅋㅋㅋ 답답하면 또 말씀하시겠지. 업무 이야기는 당연히 경청해서 듣지만 제자이자 신규 교사에게 그냥 하는 잔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해봤는데 진짜 내가 들을 필요 없는 그 쓸데없는 말들이 뇌로 안 간 것처럼 뭐라고 하셨는지 잘 기억이 안 나는 신기한 경험ㅋㅋㅋㅋㅋ 신규에게는 업무 희망서를 받지 않고, 발령 나는 날짜를 고려해 보면 업무 희망서를 받을 수가 없는 시스템으로 내가 하고 싶지도 않은 업무를 1년간 하는데 최선을 다해서 하는 것은 맞지만 왜 관심을 가져야 하는지... 관심 없이도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게 열심히 업무를 할 수 있는데 ㅋㅋㅋ


6명의 방송반 아이들 중에서 주현이는 아직도 연락을 종종 한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아이고, 까칠했던 몇몇 방송반 아이들 속에서 나에게 힘이 된 아이지. 이제 30대 중반이 되어 자기처럼 귀여운 두 딸과 함께 알콩달콩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주현이 엄마도 아닌데 내가 다 흐뭇하다. 방송 기계에 관심 없는 신규 교사였지만 그래도 방송반에 진심이었던 주현이를 비롯한 몇몇 아이들 때문에 1년을 별 탈 없이 잘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마운 일이지. 주현이가 시집을 가면서 이제 부산에 살지 않아서 보기 어렵지만 조만간 꼭 한 번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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