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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o Lee Jan 01. 2021

크로#26. 두브 4:공방전 그날, 두브로브니크

대지진, 그리고 1991년~1992년 독립전쟁의 상흔과 재건

두브로브니크 3일째:

새벽, 건너편 BABIN KUK 지역에 드리웠던 스르지산 밤기운이 떠오르는 아침 해에 뒷걸음질을 시작한다.

어제 비가 많이 내려 대기는 청명하고, 물감 듬뿍 찍은 큰 붓으로 슥슥 칠해가는 것처럼 건너편 언덕과 집, 그리고 바다에 황홀한 오렌지 빛이 번지는 중이다.

동네 주택, 핑크색 벽면도 선명하게 제 빛깔을 담아낸다.

바다에선 하얀 여객선과 선박들이 저마다의 여정을 향해 일찌감치 물살을 가르며 나아간다.

봄바람에 실려 온 옆집 오렌지 나무 향에 도취한 우리도 몸을 돌려 좀 이른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어제 일정이 비로 인해 짧았기 때문에 오늘 돌아볼 지역이 넓다.

어젯밤 지도에서 검색해보니 숙소에서 성벽까지는 2.8km에 도보로 약 30분 거리이다.

숙소가 있는 언덕의 고도는 110m이고 성벽은 필레문 기준으로 18m이니 약 100m 고도 차이를 계단을 통해서 계속 내려갔던 것이다.

어제는 성벽을 둘러봤으니 오늘은 성벽 안 구 시가지를 보기로 한다. 날씨가 좋으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오늘에야 아드리아 해의 진주그 진면목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다.


스르지산 그림자 덮인 마을의 아침


로브리예나체 요새 (Lovrijenac)

오늘은 성벽 앞에 있는 로브리예나체 요새로 먼저 향한다.

11세기, 37m 절벽 위에 축조된 이 요새는 두브로브니크 본성을 지키는 외성이자, 요새로서 구시가지의 정문인 필레 게이트, 그리고 서쪽 항구를 보호하기 위해 건축하였다.

작은 만을 두고 성벽과 떨어져 있는 절벽 위에 세워졌다. 도시 바깥을 향한 요새 벽은 무려 12m나 되는 철통 방어를 자랑하지만 도시 쪽 두께는 고작 60cm에 불과하다.

요새 입구 위쪽에 "Non Bene Pro Toto Libertas Venditur Auro"(세상의 모든 금에도 자유를 팔아넘기지 않는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성벽에서 바라본 로브리예나체 요새
요새로 오르는 길
로브리예나체 요새

다음은 요새 내부 모습들이다.

두브로브니크 여름 축제 시, 연극이 상영되기도 한다고
요새의 내부
요새 내부
 건너편 로크룸섬이 보임
툭 트인 아드리아해를 비로소 볼 수 있다
저 바다에 나타난 적들은 누구였을꼬?
요새 내부
바다를 향한 요새의 대포
요새에서 바라본 아드리아해

어제 비 맞으며 걸었던 구시가지 성벽과 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곳 요새에서 건너다 보인다.

두브로브니크의 성벽은 13세기에서 16세기 사이에 건설되어 현재 부분적으로 보수 중임을 어제 보았지만 원상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길이는 1940m,  높이는 최고 25m에 가장 두꺼운 곳의 벽은 6m이며, 성벽 중간 중간에 6개의 요새가 자리한다.

가파른 절벽 위 성벽길을 걷는 관광객들 모습이 보인다.
요새에서 바라본 시가지와 성벽
요새에서 내려다본 시가지
오른쪽 돌출 부위가 보카르 요새
 성벽과의 사이에 만을 두고 요새를 축조

요새에는 열 개의 대포로 바다와 육지 양쪽을 모두 방어하도록 되어 있어서 대포는 바다로도 향해있고 시가지로도 향해 있다.  

성벽 길 이쪽에서 건너다 보니 한눈에 잘 들어온다. 성벽 못지않은 훌륭한 뷰 포인트 요새인 듯하다.

이 아름다운 푸른 아드리아 해와 시내를 향해  겨눠져 있는 大砲門들의 target들문득 궁금하다.


‘12세기에 라구사 사람들은 렉터(Rector)라고 불리는 지도자를 선출하는 공화정을 채택하였고, 라구사는 비잔틴 제국의 영향을 받다가, 1205년 베니스가 라구사를 공격, 점령당했다.

1358년 라구사 사람들은 베니스의 지배를 거부,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지배를 선택했다.

이후, 달마티아 지방을 둘러싼 각축전으로 두브로브니크 공화국의 종주권은 자주 바뀌었다.

오스만 제국에 넘어간 이후, 대지진을 겪고 나서 점차 지중해 중심의 무역이

대서양으로 바뀌는데 영향을 받아, 해상무역의 중심에서조차 밀려나기 시작했다.

드디어 19세기에 들어서 라구사 공화국은 무너졌고,

나폴레옹에 의해 이탈리아 영역으로 편입되었다가 프랑스 일리리아 주의 일부가 되었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제국,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지배를 거쳐, 2차 대전 이후

1990까지 유고연방의 일부였다가

1991년 크로아티아가 되었다.


이 지난한 역사 속에서 로브리예나체 요새의 포구 목표물은 얼마나 자주 바뀌어야 했을까!

아드리아해를 향한 대포
시가지를 향한 포. 요새의 두께는 60cm
중앙 5층 건물은 1895년 문을 연 힐튼 임페리얼 호텔

해발 415m  가파른 스르지 자락이 시가지를 병풍처럼 둘러치고 있다.

케이블카로  오를 수 있는 스르지 산
스르지 산자락 경사면에 자리 한 시가지

마을의 화가 아틀리에

요새를 나와 구불거리는 작은 골목을 걸어 필레 문을 향해 가던 중, 한 건물 문 열 아티스트의 작업실이 눈에 띈다. 마침 작업 중인 화가 그림들을 보고 가라며 우리를 이끈다.

좁은 문을 들어서서, 계단을 몇 개 내려간 반지하의 넓지 않은 공간에 작품들이 그득하다.

왕성한 작품 활동 중임이 엿보인다.

돌아 나와 길을 걷자니 빼꼼히 열린 옆집 문틈으로, 한 아주머니가 눈인사를 건네신다. 오가는 많은 관광객들로 주민 입장에선 피로도가 높을 만도 한데, 미소를 보내주니 우리도 반갑게 응수한다.

마을의 음식점

필레 문

어제 왔던 필레 문을 다시 들어선다.  두 개의 문 사이에 있는 다리는 방어를 위하여 도개교 방식으로 건축되었으며, 외부 문은 15세기에, 내부 게이트 안쪽의 아치 모양 문은 1537년에 세워졌다.

1991년의 전쟁 에도 문은 다행히 화를 면했다고 한다.

문 위, 이 도시의 수호성인 성 브라이세(St. Braise) 상은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제작한 것으로, 손에 구도시의 모형이 들려있다. 성인이 이 도시를 수호한다는 의미의 블리세 성당 지붕의 조각상과 같은 모양다.

도개교 지나 필레 문과 도시 수호성인 브라이세 상

오노프리오 분수 (Onolrio's Great Fountain)

 안으로 들어서 맨 먼저 만나는 오노프리오 분수는 아쉽게도 공사 중이다.

분수는 1438년에 오노프리오 데라 키바(Onofrio de la Cava)가 만들었다.

16 각형 기반의 석조물에 동물과 사람의 입을 표현한 조각상 각각의 입에서 물이 나와 배수 풀로 떨어지도록 되어있다. 기반 위 커다란 쿠폴라를 장식한 조각상은 1667년의 대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분수의 물은 약 12km 떨어진 리에 두브로바츠키(Rijeka Dubrovacka)에서 공급받았고, 이 수로는 크로아티아 최초인 동시에 당시로서는 물 공급의 획기적 시설이었다고.

오노프리오 분수대 (Onolrio's Great Fountain)는 공사 중
서울까지 거리는?

선물가게 앞, Seoul  다섯 글자만 봐도 반갑다.

멀리 떠나왔음 실감.  

식당이나 기념품 가게에 한국어 표기도 많고, 상인들이 더러 짧은 한국말을 하는 걸 보니 근래에 높아진 인기로 한국 관광객들이 많이 오나보다.

더 조심스러워진다.


플라차 거리(스트라둔)

우물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면 길이 직선으로 뻗어있다.

1468년 건설된 이 플라차 거리는 서쪽 필레 문에서부터 동쪽의 플로체 문까지 280m라고 한다.

이 길은 원래 섬이었던 성의 남쪽, 바다 쪽의 로마계 주민들 거주지역인 라구사와

북쪽, 육지 쪽에 자리한 슬라브계 주민들의 지역인 두브로브니크가 나뉘던 수로로 이곳을 통해 물자 수송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운하를 메워 메인 도로로 건설했다.

성 안의 이 도로만 폭이 다른 길의 3배이고 이 길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나있는 골목길들은 매우 협소하다.

원래는 대로 양쪽으로 호화로운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으나 1520년에 이어 진도 10으로 추정되는 1667년 대지진으로 파괴되고 말았다.

당시 공화국 법령은 주거용 건물의 빠른 복구를 위해 화재피해 방지용 자재로 짓도록 했으며, 건물의 높이, 모양, 출입구 등을 동일하게 규정했 1층은 상가로, 2층부터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도록 규정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단순한 모습의 건물들을 건축했다고 한다.

대로를 중심으로 생선의 가시처럼 성 양안으로 뻗어있는 길은 좁고, 특히 구시가 중심에 비해 양 바깥쪽은  높아져서 계단으로 오른다.

플라차 대로
왼쪽 첫 번째 지붕이 성 구세주 성당, 이어서 성 프란치스코 성당과 종탑. 두 건물 사이 좁은 골목길이 약국으로 들어가는 길
대지진 후, 빠른 주택 공급 위해 획일적으로 건축된 스트라둔 건물들

대로 초입 북쪽으로 프란체스코 수도원과 약국이 있다.

1317년 수도사들이 처음 약국 문을 열었고 이는 유럽에서 3번째였다. 현재도 여전히 영업을 하는 약국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곳이 되었다고 한다. 히잡을 쓴 여성들이 진지한 모습으로 구매 중이다. 그 안에는 제약 박물관이 있어서 약 제조, 방법, 기구 등에 관한 자료가 있다.    

1347년에는 양로원이 만들어졌으며 그 밖에도 주민복지를 다양하게 실현함과 동시에,

1377년엔 세계 최초의 검역소를 세웠다고 한다. 해상무역의 거래 범위가 넓다 보니 전염병 방지 필요성이 어느 지역보다도 컸을 것이다.


스폰자 궁전     

획일적인 건물들의 도열을 받으며 스투라둔 거리를 끝까지 걸으면 스폰자 궁전에 이른다. 

지진에도 살아남은 3곳 중 한 곳인 스폰자 궁전은 현재 크로아티아 독립전쟁 기념관으로도 사용된다.

궁전은 1516-1521년 사이에 세를 징수하기 위한 세관 목적으로 파코에 밀리체비치(Pakoje Millicevic)와 코르출라 출신의 안드리이치( Andrijić) 형제들에 의해 세워졌다.

물품을 거래하는 상인들과 해외에서 두브로브니크로 들어오는 상인들에 대한 세금이 이 곳에서 관리되었다.

스폰자 궁전 아치에 라틴어로 적힌 문구는 이러하다.

 “ Fallere nostra venant et falli pondera; meque pondero cum merces ponderat ipse deus” : 우리는 속임수와 거짓으로 측정하는 것을 금한다. 내가 물건의 무게를 저울질할 때, 하느님은 나를 두고 저울질하실 것이다.


두브로브니크 공화국 시절에는 조폐국(造幣局)으로서, 이후 은행, 학교, 국고 (國庫) 그리고 재무부 등의 기능을 담당했다고 한다. 두브로브니크 대지진에도 피해를 입지 않아서 고딕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건축물로 인정되고 있다.

섬세하게 조각된 6개 기둥아치로 이뤄진 1층을 지나 2층은 고딕 시대 말기 양식의 창문이고 그 위층은 르네상스 양식의 창문이 여전히 남아있다.

또한 스폰자궁에는 1000여 년이 넘는 역사를 보존한 국가 기록 보관소가 있다.

전 유럽을 걸쳐 방대한 문서 자료들을 보유하고 있는 곳 중 하나로 손꼽힌다.

정원과 연결되는 방이 전시실이라고 한다.

요즈음에는 두브로브니크에서 열리는 많은 퍼포먼스, 여름 페스티벌 등을 개최하는 장소로 쓰이며 지난 전쟁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크로아티아 군인 기념비가 궁전 내부에 안치되어 있다.      

스폰자 궁전
2층은 고딕, 3층은 르네상스 양식의 창문 장식

크로아티아 독립전쟁의 상흔

독립전쟁기념관 전시된 사진들을 보니 무척 충격적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유럽의 화약고 발칸반도’라는 표현은 유럽과 아시아의 교차점으로 그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세력의 지배를 받으면서 복잡한 민족, 문화, 영토 문제가 발생한 역사에 기인한다고.

불과 30년도 안된 시기에 일어난 이 비극의 원인은 여러 방향으로 각기 다르게 해석하는 글들도 더러 있지만 어쨌든 이 시기, 많은 시민들이 겪었을 고통의 크기가 사진 담겨있다.

1990년 포위당했던 이곳에 도착한 뉴질랜드 사진작가가 찍은 것들 포함되어 있다.

세계대전 중에도 이 도시를 지키려는 세계 석학들의 적극적인 운동으로 197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였다.


이 곳의 전쟁은

유고연방에서 해체되어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를 저지하기 위해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과 몬테네그로 국토 방위군이 7개월간 이 도시를 포위하며 진행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세르비아 측 입장도 이해 못할바 아니다.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었다.

독립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르비아인과 유태인들에 대해 잔인한 방법의 학살을 저지른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의 25만 명은 국외 추방, 33만~39만 명(최대 75만 명으로 추산되기도)은 학살되었다.

(이 학살에, 개종을 요구하는 크로아티아 측 가톨릭 사제들의 개입이 있었다는 불편한 진실이 숨어있다고.)


이에 세르비아는 유고연방이 해체되면서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표명하자,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는 세르비아인들이 또다시 피해를 입을 것을 두려워하면서 이전의 '대 세르비아'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의도가 더해져

전쟁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 후 보스니아와 코소보에서의 전쟁에서

세르비아의 대통령 밀로세비치

잔인한 방법의 대량학살을 감행함으로써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기다리던 중 감옥에서 병사했다.


현재 관광도시로 각광받고 있는 두브로브니크 배경에는, 재건과 복구에 유네스코의 도움이 있었다. 

전쟁 발발 당시 영상 다음 사이트에 볼 수 있.

https://youtu.be/WE0pHt6L6yE

https://youtu.be/WF0y04LlNJ0

전쟁 첫 시기,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도시에 대해 광범위한 포격을 가했으며, 특히 두브로브니크의 포격 피해가 가장 심했다. 포격으로 불타오르는 스트라둔 (위키백과)


우리도 여전히 휴전 중...

불과 60년 전에 우리 또한 동족상잔이란 유래 없는 전쟁 발발로

한국이란 국명 대신 '6.25 전쟁국가'로 세계인들에게 각인되었기에

더구나 우리나라는 여전히 휴전국인 현실을 생각할 때

이들의 전쟁사에 마음이 무겁게, 무겁게 얹힌다.


세계 여러 곳에서 여전히

전쟁으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고 처절하게 살아가는 사람들 생각하, 

진정한 평화 빠른 를 간절히 희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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