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교사로서 바라보는 교육정책-2
현직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 중인 권이근, 곽노근 두 분 선생님께서 펼쳐내신 <무기력 교사의 탄생>(2025)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을 고르게 된 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무기력의 원인을 찾고자 함이었다. 그냥 삶이란 것 자체가 원래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건지, 아니면 내가 '대한민국 교사'이기 때문에 유독 더 정도가 심한 건지 궁금했다. 다른 교사들은 어떤 지점에서 무기력함을 느끼는 걸까. 그들과 내가 얼마나 같고 다를까.
책은 두 선생님께서 서로 주고받은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다. 곽노근 선생님은 병가를 신청하고 1년간 휴식 중이었고, 권이근 선생님은 일선 학교에서 고군분투 중인 상황이었다. 쉬는 사람은 쉬는 대로 마음이 좀 더 힘들 것이고, 일하는 사람은 일하기 때문에 육체적으로 조금 더 힘들겠지만, 힘들고 지친다는 점에서는 두 분 다 마찬가지일 테다. 책 내용 중 일부분을 발췌하면서 이야기를 조금씩 나눠보도록 하자.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사회가 합의한 올바른 가치, 시대가 요구하는 역량, 지구적 존재로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학을 가르치는 존재가 바로 교사입니다.
그렇지만 대한민국 교사들은 가르치는 행위에 집중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존재론적 아이러니에 허우적대는 가련한 존재입니다.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를 증명하지 못한 채 끊임없이 외부에서 자존감을 부정당하는 배경에는 지나치게 넘쳐나는 행정 업무가 있습니다. (중략) 자꾸 문제를 떠들고 다양한 생각이 오가야 건설적인 해결 방법이 나올 텐데, 너무나도 경직되어 함부로 입을 열지 못하는 우리 교직 사회에 속이 터집니다.
본책 p.47
권이근 선생님의 편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쨌든 교사라는 직업은 본래 가지고 있어야 할 직업적 정체성과 현실 속에서 실제로 작동하는 양상 사이의 괴리가 심각하게 크다. 어쩌면 두 분은 초등교사이기 때문에 행정 업무의 과중함을 그 괴리감의 이유로 들었을 것 같은데, 중등교육도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또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부분이 있다. 고등학교의 경우, 바로 그 '가르치는 행위' 자체까지도 회의감이 들게 만든다. 무슨 말이냐 하면...
학교에서 '수업'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행위를 가만히 들여다보자. 네모난 교실 안에 스무 명 남짓 되는 학생들이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 그리고 교사 한 명이 들어와 교탁 앞에 선다. 교사는 전자칠판 화면을 세팅하고, 준비한 수업을 한다. 학생들은 어떨까? 열심히 듣는 학생들은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 몇 명은 딴 생각을 하고, 몇 명은 다른 공부를 하고, 몇 명은 엎드려 잔다. 가끔 떠들어서 수업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다(심지어 고등학교에서!).
그런 수업이 몇 날 며칠이 이어지고 이런 상황이 일상으로 느껴지는 순간, 교사는 현타가 온다. '나의 존재 가치는 무엇이지?', '교사는 수업하는 사람인데, 내 수업이 필요없으면 나는 왜 여기 있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면 극도로 우울해진다. 그런데 무턱대고 학생에게 내 수업을 들으라고 강요할 수도 없는 시스템이다. 왜? 학생 입장에선 그는 실제로 내 도움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공부를 자신의 계획대로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다. 부족한 부분은 인터넷 강의를 통해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고, 자기주도학습이 가능하다면 학교 선생의 어설픈 강의를 듣느니 차라리 자습하는 편이 훨씬 낫다. 교사 입장에서는 자괴감이 밀려오는 부분이다.
'교사는 생활기록부(이하 생기부)를 쓰잖아요. 과목별/동아리별 세특도 있고, 담임은 자율이나 진로활동 특기사항도 쓰는데 그만큼은 가치가 있는 것 아닌가요?'라는 질문을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철저히 경제학적 논리에 비추어 이를 반문해 보겠다. 경제학은 '투자 대비 효율'을 강조한다. 생기부 쓰는 일에 교사가 시간을 얼마나 쓴다고 생각하는가? 심하면 한 학기 내내 붙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나를 비롯한 고등학교 교사의 일상을 파헤쳐 보자. 일과 시간 중에는 정해진 시간에 수업 들어가랴, 남는 시간엔 행정 업무 하랴, 퇴근 이후에는 방과후 보충수업과 특강을 하거나 초과근무를 하고, '근무시간이라고 정해져 있지 않은 시간'에 생기부를 쓰거나 수업 준비를 한다. 그럼 그 시간은 언제인가? 바로 초과근무가 없는 퇴근 후 저녁 시간이나 주말이다. 그럼 언제 쉬는가? '쉼'이라고? 그런 게 어디 있나. 그냥 일하다 지쳐 잠시 엎어져 있으면 그게 쉼이다. 길어야 10분? ...여기까지만 듣고 나면 교사들이 방학 있다고, 일찍 마친다고, 일반 회사원보다 좋은 직업 아니냐고 배부른 소리하고 징징거린다고 손가락질할 사람은 없겠지 아마?
책 내용을 조금 더 보자.
...저는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들이 보여 주는 폭력적인 행동과 말이나 권위적인 태도가 신물이 날 정도로 싫었습니다. 거기에 한국 현대사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운 독재 정권을 치를 떨며 비판한 터라 민주적 교사, 친근한 교사, 권위적이지 않은 교사가 되고 싶었지요. 그때는 '민주적 교사'가 어떤 교사인지 깊이 고민하지도 않은 채 어찌 보면 치기 어리게 교단에 선 듯해요.
결과는 어땠을까요. 정말 처참했습니다. '권위적이지 않겠다!'는 다짐 말고 아무 준비도 없던 저는 곧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기만 하니 아이들은 지켜야 할 선을 넘고 또 넘었습니다.
본책 p.111
인간은 반대 급부로 움직이는 경향이 강하다. 어렸을 때 폭력에 자주 노출되었다면 그와 반대로 비폭력주의자가 된다든지, 양육 환경이 방임과 방치로 점철되었다면 그와 반대로 자신의 아이는 사랑과 보호(때로는 과보호)로 키운다든지 한다는 의미이다. 나 또한 그랬다. 중고등학교 때 숱한 폭력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했고, 그것이 싫어서 다시는, 어떤 형태로든 학교로 되돌아오는 일은 없었으면 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나는 교사가 되어 학교로 되돌아왔다. 그럼 나는 어떤 교사로 자리잡아야 할까? 그 시절 교사의 모습이기는 싫었다. 그랬다. 나도 위의 선생님처럼 '민주적이고 친절한 교사'이고 싶었다. 결과는? '할많하않', '이하생략'이다.
올해 비슷한 일이 있었다. 나를 자기들 멋대로 요리하며 나의 인권을 유린한 (괘씸하기 짝이 없는) 모 학생들이 있었는데, 나는 진실을 밝힌 후 그들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며 말 그대로 x지랄을 떨었었다. 교감 선생님과 부장 선생님이 오셔서 나를 말렸고, '그렇게 하시면 아동학대로 신고당할 수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에는 그럴 수 있겠다 싶기도 했고 그래도 교감 선생님과 부장 선생님이 나를 보호해 주시려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해서 감사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얘네만 학대당한 거야? 나도 얘들한테 학대당했잖아. 내 인권은? 내 실존은?'
그 이후로 학교 생활이 매일 지옥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건사고는 계속해서 일어났고, 내가 감당할 선을 훌쩍 넘겨버렸다. 어쩌면 내 그릇이 작은 것일지도 모르지. 그랬든 어쨌든 나는 더 이상 일상을 지속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고, 이렇게 병가를 내서 치료를 받으며 잠시 쉬고 있다.
학교에 있는 모두에게 미안하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에 앞서 일단 내가 살아야겠다 싶었다. 그때 당시만 해도 내가 어떤 선택을 할지 나조차도 예측할 수 없었다. 매일 극단적 선택을 하는 상상이 머릿속으로 재생되었고, 그렇게 하면 남은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계속해서 영상으로 펼쳐졌다. 괴로워 죽을 것만 같았다. 어차피 내가 죽어도 학교에 미안한 건 매한가지다 싶어서 일단 살아서 미안한 편을 택했다. 솔직히 지금 와서는 아찔하다. 자살은 보험금도 안 나온단다. 난 그걸 몰랐다. 죽어서 가족에게 보험금이라도 안겨주려고 생각했는데 끝까지 바보 짓을 할 뻔했다. 책 내용이나 좀 더 보자.
...아동 학대 고소 위협에 일상적으로 노출된 교사 처지에서 '아이들을 생각하라'거나 '교육적 관점을 놓치면 안 된다' 따위가 어디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요구해야 합니다. 안전하게 가르칠 권리를, 학부모나 학생한테 맞지 않을 권리를, 고소당하지 않을 권리를, 자살하지 않을 권리를, 시민과 정부를 향해 외치고 또 외쳐야 합니다. (중략)
학교에는 두 모습이 공존해요. 학부모와 아이들이 도를 넘는 행동을 해서 말할 수 없이 고통받는 교사의 모습과, 아이들에게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거나 무관심한 교사 때문에 알게 모르게 상처받는 아이들의 모습이요. 둘 다 우리가 외면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한 모습에 집중하느라 다른 모습을 외면하지는 않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교사도 학생도 상처받고 있는 학교를 바꾸기 위해 우리 교사들이 먼저 자기 모습을 돌아보았으면, 힘겹겠지만, 그러면 좋겠어요.
본책 p.121
예전에는 타성에 젖은 선배 교사들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일하기 싫으면 그냥 그만두고 자리를 비켜주면 되는 것 아닌가? 왜 저렇게 대충대충 버티고 있는 거지?' 이런 생각을 하며 속으로 그들을 비난했다. 하지만 그들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서사를 나는 모른다. 모르면서 함부로 그들을 재단하고 욕했다. 이건 명백하게 내가 잘못 생각한 거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그들의 탓이 아니다(아닌 게 아니더라도 일단 그렇게 믿고 싶다.).
내가 다시 학교로 돌아간다면, 나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아직은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돌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것도 모르던 초임 시절에 '민주적이고 친절한 교사'가 되고자 해맑게 교직 사회에 발을 들였던, 그때와는 또 달라야 하지 않을까. 이제는 시스템이 어떤 상태인지, 어떤 장단점이 있는지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 적어도 그에 맞는 '부품'이 되기 위해 생각을 조금은 달리해야 하지 않나 싶다.
'부품'이라는 표현이 서글픈가? 나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솔직히 일하면서도 내가 일개 부품이고,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늘 받아들이면서 일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억울하다거나 분노를 느끼지는 않았다. 내 속내를 좀 더 드러내자면, 나는 일이 많은 건 얼마든지 상관없다. 오히려 일을 많이 해서 잡념을 잊을 수 있다면 차라리 더 좋았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 드러눕게 된 건, '사람' 때문이다. 어떤 특정한 누군가의 무엇 때문이 아니라 그냥 사람이라는 존재가 필연적으로 가진 어떤 속성이 나를 질리게 만들고 말았다. 인류애가 사라졌고, 내가 하는 일이 그냥 다 의미를 잃었다. 나의 내면에서 무언가가 쾅 하고 터져버렸다. 그동안 쌓아왔던 나름대로의 노력이, 성과가 다 무너져내리는 걸 느꼈다.
인간관계는 가면 갈수록 어렵다. 젊었을 땐 모른다는 이유로 용서가 되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젠 나이도 어느 정도 차고 나니 모른다는 핑계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도망갈 구석이 없어진 것이다. 아직도 잘 모르는데, 모른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그냥 부딪치고 깨질 수밖에 없다. 젊을 때는 부딪치고 깨져도 젊어서 좀 덜 아픈데, 나이를 먹으니까 체력도 후달리고 맷집도 후달려서 부딪치고 깨질 때마다 제로점 데미지를 그대로 받아서 너무 아프다. 아파서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난 이렇게 '무기력 교사' 중 한 사람이 되어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조용필, '킬리만자로의 표범' 노랫말 중 일부 인용). 누군가는 나의 고통에 공감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꽤 있으리라 생각된다. 뭐 겨우 그 정도 가지고 그러느냐 하면, 나는 그냥 내 깜냥이 거기까진가 보죠 하고 답하련다. 솔직히 이제 나도 모르겠다. 흐름에 맡겨보려 한다. 이 흐름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지만, 그냥 아무것도 지향하지 않고, 의지하지 않고, 흐름 속에 나를 놓으련다.
다만 글쓰기는 계속 할 것이다. 나는 살려고 쓴다. 죽지 않으려고 쓴다. 쓰는 행위를 멈추는 순간 나는 죽는다. 누군가 '글'이라는 것을 두고 이런 말을 했다. '멈추지 않는 한 쌓일 수밖에 없는 자산'이라고. 그렇다. 어떤 형태로든, 어떤 장르로든 나는 글쓰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읽고, 듣고, 쓰는 행위의 무한 반복이 내 삶의 모습이다. 이 삶의 모습을 지키고 나의 중심을 올곧게 세우기 위해 나는 오늘도 읽고, 듣고, 쓴다. 그것이 나의 무기력을 해소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