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시인 정호승

by Charles Walker

시인 정호승은 1950년 1월 3일 경상남도 하동군 출생으로, 1973년 신춘문예에 '첨성대'라는 작품으로 데뷔하였고 이어서 '슬픔이 기쁨에게', '수선화에게', '맹인 부부 가수' 등의 걸출한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였다. 국어 교사라면 정호승 시인의 작품 한두 개쯤 다 알고 있을 것이고, 무려 그의 시들을 흠모하여 이런 책까지 읽게 된 나 같은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정호승 시인의 작품은 '슬픔이 기쁨에게'이다.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수록되어 있는 만큼, 이 삭막한 시대에 경종을 울릴 만큼 좋은 작품이니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지면을 할애하여 전문을 소개해 보려 한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겨울밤 거리에서 귤 몇 개 놓고
살아온 추위와 떨고 있는 할머니에게
귤값을 깎으면서 기뻐하던 너를 위하여
나는 슬픔의 평등한 얼굴을 보여 주겠다.
내가 어둠 속에서 너를 부를 때
단 한 번도 평등하게 웃어 주질 않은
가마니에 덮인 동사자가 다시 얼어 죽을 때
가마니 한 장조차 덮어 주지 않은
무관심한 너의 사랑을 위해
흘릴 줄 모르는 너의 눈물을 위해
나는 이제 너에게도 기다림을 주겠다.
이 세상에 내리던 함박눈을 멈추겠다.
보리밭에 내리던 봄눈들을 데리고
추워 떠는 사람들의 슬픔에게 다녀와서
눈 그친 눈길을 너와 함께 걷겠다.
슬픔의 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기다림의 슬픔까지 걸어가겠다.

정호승, <반시(反詩)> (1976) 수록


'슬픔'과 '기쁨'이 갖는 보편적인 인식을 전복하여, '슬픔'을 인간에게 필요한 것으로, '기쁨'은 절제해야 할 것으로 탁월하게 풀어낸 시이다.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가 없다. 슬픔을 건네는 자로서의 삶이 과연 녹록할까. 거친 가시밭길 같은 길일지라도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고자 하는 의지가 반짝반짝 빛나는 위대한 작품이다.


정호승,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 (2020)

그리하여 이 책을 골라 들게 된 것이다. 정호승이 2020년에 발표한 '시가 있는 산문집'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이다. 아쉽게도 '슬픔이 기쁨에게'는 이 책에 수록되어 있지 않지만, 시와 산문이 교차로 제시되는 구성으로 되어 있어 그의 또 다른 명작들과 그 작품에 얽힌 일화(산문)가 나란히 수록되어 있어 '시인 정호승'을 넘어 인간 정호승이라는 존재의 깊고 진한 예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2024년에는 이 책의 후속편 격인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가 발표되었는데, 사실 그 책을 읽기 위해 전작인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먼저 찾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책을 읽은 뒤 본래 정호승 시인을 좋아했던 마음보다 더 크게, 더 많이 좋아하게 되었다. 또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는 반드시 사서 읽겠다는 다짐도 하게 되었다.


이 책에 빠져 있었던 당시에,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아들에게도 어느 날 밤에 문득 이 책에 실린 시를 몇 가지 골라 읽어 주었더니,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그러는지 어쩌는지 몰라도 참 좋아하며 몇 날 며칠을 읽어 달라고 말했었다. 아들에게 읽어주었던 시 몇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본책 p.23


이 작품은 '슬픔이 기쁨에게'만큼 유명세를 떨친 작품일 것이다. 가장 감명깊게 와 닿았던 구절은 아무래도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일 것 같다. 이집트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이 시를 강의할 때, '신은 눈물을 흘리지 않습니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라며 끝내 저 구절을 설득시키지 못했다는 웃픈(?) 일화가 있기도 하지만, 나는 시인이 저 구절을 써내려가게 된 맥락을 왠지 이해할 것도 같다. 세상 모든 피조물의 기도를 들어주는 전지전능한 신일수록 어쩌면 더욱 깊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을까. 그리고 어쩌면 남몰래 눈물을 훔치는 날도 없으란 법이 있겠는가. 신을 인격화하여 우리와의 거리를 좁힘으로써 신이 우리와 너무 멀리 있지 않고, 언제든 어깨에 기대어 위로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시인은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바닥에 대하여


바닥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한다

결국 바닥은 보이지 않는다고

바닥은 보이지 않지만

그냥 바닥까지 걸어가는 것이라고

바닥까지 걸어가야만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바닥을 딛고

굳세게 일어선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다고

발이 닿지 않아도

그냥 바닥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바닥의 바닥까지 갔다가

돌아온 사람들도 말한다

더이상 바닥은 없다고

바닥은 없기 때문에 있는 것이라고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이는 것이라고

그냥 딛고 일어서는 것이라고

본책 p.55~56


개인적으로는 이 시를 통해 내 지난 생애를 돌아보게 되었다. 절망과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다고 생각했고, 왜 하늘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연속해서 주는 것인지 원망하는 마음을 갖기도 했었다. 더 이상 바닥으로 내몰릴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더 아랫바닥이 있었고, 점점 아래로 아래로 가라앉기만 했던 시절도 있었다. 그때 이 시를 알았더라면 조금 더 빨리 마음을 추스르고 일어날 수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렇게 오랫동안 준비했던 임용을 허망하게 포기하려는 마음 같은 건 먹지 않았을 텐데. 딛고 일어설 바닥이 있다는 것으로 감사할 줄 알았어야 했는데.


강물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본책 p.155


절망도, 희망도 결국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그저 순리대로, 흘러가는 대로 관망할 뿐.


맹인 부부 가수


눈 내려 어두워서 길을 잃었네

갈 길은 멀고 길을 잃었네

눈사람도 없는 겨울밤 이 거리를

찾아오는 사람 없어 노래 부르니

눈 맞으며 세상 밖을 돌아가는 사람들뿐

등에 업은 아기의 울음소리를 달래며

갈 길은 먼데 함박눈은 내리는데

사랑할 수 없는 것을 사랑하기 위하여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을 용서하기 위하여

눈사람을 기다리며 노랠 부르네

세상 모든 기다림의 노랠 부르네

눈 맞으며 어둠 속을 떨며 가는 사람들을

노래가 길이 되어 앞질러가고

돌아올 길 없는 눈길 앞질러가고

아름다움이 이 세상을 건질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절망에서 즐거움이 찾아올 때까지

함박눈은 내리는데 갈 길은 먼데

무관심을 사랑하는 노랠 부르며

눈사람을 기다리는 노랠 부르며

이 겨울 밤거리의 눈사람이 되었네

봄이 와도 녹지 않을 눈사람이 되었네

본책 p.189~190


정호승 시인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이자 아들이 제일 좋아했던 시이다. 아들은 이 시의 낭송이 끝난 후 '봄이 와도 눈사람이 녹지 않으면 어떡해? 그럼 눈 속에 영영 갇히는 거야?'라며 입을 삐죽이고 곧 울 듯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어쩌면 이런 게 시가 주는 매력이 아닐까. 같은 시를 읽어도 다른 이미지를 그려내고 다른 해석을 제시할 수 있는 것. 문학에 정해진 답은 있을 수 없다는 지론이 다시금 단단해져 감을 느꼈다.


봄길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본책 p.229


이 시를 읽으면서는 나를 비롯한 모든 선생님들이 생각났다. 메마르고 척박한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교육이 설 자리는 이제 얼마만큼 남아 있을까? 아이들이 교육을 필요로 하지 않는데, 우리가 존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일까. 이런 부분에 의구심을 가지는 선생님이 있다면 마지막 구절을 한 번 더 음미해 보자.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 스스로 사랑이 되어 / 한없이 봄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그저 걸어갈 수밖에. 사랑이 곧 나이고, 내가 곧 사랑이라고 믿으며.


정호승,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2024)

그로부터 4년이 지나 두 번째 산문집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가 세상 빛을 보았다.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려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보통은 고통을 거부하려 하고, 고통이 연이어 찾아올 때는 '시련'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부르려 하며 신에게 부르짖는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하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는 신을 '원망'한다. 나도 그러한 과정을 겪어 왔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은 신도, 누구도, 그 아무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많은 이유들 중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는 요인이 바로 정호승 시인의 두 작품,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와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 덕분일 것이다.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를 읽기 위해 전작인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일부러 읽었다고 밝힌 바 있다. 정호승 시인을 원래부터 흠모해 왔기도 했지만, <외로워도 외롭지 않다>를 읽고 나서 내 안에 깊숙이 자리한 고독과 원망, 더 적나라하게 이야기하자면 한(恨)이 어느 정도 상쇄되는 경험을 하면서 정호승 시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고통 없는 사랑은 없다>를 읽으면서는 마저 남아 있던 인간적 응어리마저도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정호승 시인이 겸허하고 진솔한 마음으로 자신의 벌거벗은 심신(心身)을 기꺼이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다. 그 어떤 것도 진실을 이길 수는 없다. 진실이 담긴 마음을 진심(眞心)이라고 부른다.


정호승 시인은 고통으로 점철된 삶 속에서 세상과 신을 원망하고 사람을 증오해 왔던 과거의 자신을 '오만하고 부족했다'라고 자평하며 고해성사라도 하듯 한 편 한 편의 글을 써내려 갔다. 문학이라는 한 분야에서 이미 거장으로 자리하고 계신 정호승 선생님도 '오만하고 부족하다'라고 자신을 평가하는 마당에 한낱 내가 무엇이라고 감히 사람을 잣대질하고, 세상을 원망하고, 신을 부정할 수 있겠는가? '고통의 시인' 정호승 시인을 매개로 나 또한 세상과 자연의 섭리에 대해 조금은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필부의 이런저런 잡소리를 시끄럽게 떠드는 것보다는, 이쯤에서 정호승 시인의 산문 한 편을 오롯이 내보이며 마무리짓는 편이 책 소개 측면에서도, 글의 전체적인 완성도 측면에서도 더 좋을 것 같다. 아직도 정신적으로 방황하고 있는 지금의 나에게도, 또 쉽지 않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에게도 보석과 같은 한 편의 글이 될 것 같다.


쓴맛을 맛보지 못하면 단맛을 맛보지 못한다 (본책 p.118~121)


설탕이 귀하던 내 어릴 때는 설탕을 마치 금가루처럼 여겼다. 학교에서 돌아와 가방을 마루에 던진 채 지친 듯 벌렁 드러누워 있으면 어머니가 맹물 한 사발에 설탕을 한 숟가락 타서 주셨다. 아버지에게만 주시는 그 귀한 설탕을 아들인 내게 주시는 걸 보니 어머니가 나를 참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에 그걸 참 맛있게 먹었다. 그러면 왠지 피곤했던 몸과 마음에 다시 생기가 도는 것 같았다.


맹물에 설탕 탄 맛, 그게 뭐 그리 맛있었겠는가. 그저 밍밍하기만 했을 텐데 그때는 달고 맛있어서 일부러 그걸 얻어먹으려고 어머니 앞에 피곤한 척할 때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 그에 맞먹는 단맛을 만나지 못했다. 아마 그 단맛이 어머니의 사랑의 맛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어른이 되고 나서 진정 단맛을 맛보기 위해서는 쓴맛부터 먼저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상 매사가 다 그랬다. 쓴맛 없는 단맛은 결코 없었다. 실패라는 쓴맛을 맛보지 않고서는 성공이라는 단맛을 맛볼 수 없었다. 어릴 때부터 단맛부터 먼저 맛본 탓에 어른이 되어 맛보는 쓴맛은 더욱더 썼다.


오늘을 사는 청년 세대는 인생의 쓴맛을 맛보고 있을 것이다. 내일의 단맛을 맛보기 위해 오늘의 쓴맛을 맛볼 기회는 참으로 소중하다. 오늘 내가 맛본 쓴맛이 내일 맛본 단맛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쓴맛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원망만 한다면 항상 쓴맛만 맛보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수능 성적이 원하는 대로 나오지 않거나 취업의 문 앞에서 자꾸 좌절돼 인생의 쓴맛을 맛보게 되었다면 그 쓴맛을 음미하는 게 중요하다. 수능 한 문제 더 맞고 덜 맞음에 따라 웃고 울고 할 필요가 없다. 수능이 끝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할 뿐이다. 입사 시험에 낙방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모를 떠나 자기만의 인생을 시작하려고 하는 이는 대부분 실패의 쓴맛부터 먼저 보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게 중요하다. 그 쓴맛을 깊게 음미해 보라. 그래야 나중에 단맛을 보게 될 때 그 단맛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인생에는 실패가 없다. 실패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과정일 뿐이다. 작은 실패의 냇물이 모여 큰 성공의 강물이 된다. 따라서 아무리 쓴맛을 맛보더라도 참고 견딜 줄 알아야 한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겨울이라는 고통을 견뎌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청년 세대가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라면 지금은 묵묵히 고통을 견뎌내야 할 때다. 나이 든 중년 세대의 인생은 짧지만 젊은 청년 세대의 인생은 길다. 인생은 일회적인 것이지만 수능이나 입사 시험은 일회적인 게 아니다. 수능이나 입사 시험에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 전체를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고통은 인생의 쓰디쓴 국이요, 밥이라는 사실을, 그 국과 밥을 먹음으로써 인생의 생명이 유지된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자연 상태에 있는 금붕어는 일평생 약 만여 개의 알을 낳는 데 비해 어항 속의 금붕어는 삼사천 개의 알밖에 낳지 못한다. 아무런 위험도 없이 적당한 온도와 먹이를 공급받는데도 그렇다. 그것은 어항이 고통이라는 자연의 진리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고통을 수반하는 삶이 자연의 삶이므로 어항 속의 금붕어는 삶의 실재를 잃어버린 것이다.

나는 자연 상태의 금붕어이길 원하는가, 어항 속의 금붕어이길 원하는가. 비록 위협과 불안이라는 고통이 많다 하더라도 나는 자연 상태의 금붕어이길 원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고통이 있어야만 삶이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고통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고통의 과정 없이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차가운 눈 속에서 겨울을 보내야만 보리밭의 보리도 뿌리를 내릴 수 있고, 눈보라 치는 북풍을 견뎌내야 매화도 멀리 아름다운 향기를 보낼 수 있다.


인간은 오직 일등에게 관심을 갖지만 신은 자신을 견디고 극복한 사람에게만 관심을 갖는다고 한다. 또 신은 가끔 인간에게 빵 대신 돌멩이를 던진다고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돌을 원망하며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고, 또 어떤 이는 그 돌을 주춧돌 삼아 집을 짓는다고 한다.


나는 신이 관심을 갖는 인간이 되고 싶다. 신이 던진 돌멩이로 빵을 만들어 먹는 인간이 되고 싶다. 쓴맛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설탕 맛을 모르므로 오늘의 쓴맛을 내일의 단맛으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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