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음, 걸음 느리게 가보리다. 3월 23일.
나를 앞서가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걷는 것 하나는 정말 자신 있었는데. 이제 이것도 따라갈 수 없음인가 보다.
‘그래! 가는 세월을 어찌 붙잡을 수 있겠어.’ 하고 스스로에게 위로를 던져 보지만, 마음은 부쩍 약이 오른다. 약이 오른 마음은 몸뚱어리에 명령을 내린다. 더 빨리 걸어 보라고.
전해진 신호의 수수께끼를 착각한 몸뚱어리는 박자가 엉키기 시작하며 오른 다리가 왼쪽 다리를 막아서는 웃픈 현실이 눈앞에서 벌어진다.
나는 어릴 때 엄마의 학구열과 소소한 가능성의 기대감, 따라주지 않는 경제적 현실이 결합된 묘한 상황으로 하루 최소 40분은 걷고, 더해 40분은 버스를 타야 학교를 갈 수 있었다. 그렇게 국민학교 4년 (현재는 초등학교), 중·고까지 총 10년을 매일 걸었으니 짧은 세월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날마다 걷다 보면 걷는 것도 익숙해지고 지루해진다. 그럴 때면 장딴지와 허벅지 근육에 떡하니 힘을 전달하고, 앞에 보이는 사람들과 자동차 경주를 하는듯한 상상에 빠지곤 했다. 힘찬 굉음을 내뿜으며 하나씩 앞지르기가 시작되고, 재빠르게 수동 기어를 변속해 속도를 올리는 상상까지 하고 나면, 새 비닐로 덮여 있는 신형 포니 2도 부럽지 않다. 그런 상상에 빠지면 자연스럽게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거닐 듯 자연스럽게 날래지고, 그런 마음만큼 그 긴 거리의 지루함은 없어지고, 축지법을 쓴 듯 가야 할 거리가 자연스럽게 줄곤 했다.
가끔은 전자오락실의 유혹에 빠져 집에 갈 차비까지 탈탈 털어 홀랑 날려 버린 날은 몇 대의 버스를 보내며, “차비가 없는데 타도 될까요?” 한마디가 도저히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버스에 오르기를 포기하고, ‘그래 뭐 까짓것 한번 걸어가지. 뭐.’ 섣부른 마음으로 바람도 들꽃도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친구 삼아 걷고 또 걸어 밤이 되어서야 도착하는 일도 있었다.
그런 과정들로 정말 걷는 건 속도도, 거리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자신 있었는데….
지하철에서 내려 계단을 오르면서 분명 뒤에 있던 젊은이가 무심하게 나를 지나치고, 출입구를 통과해 태양의 따뜻함을 마주하기가 무섭게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깔깔거리며 제 말들을 하며 나를 앞서간다. 알량한 자존심으로 다리에 더 힘을 주고 따라붙으려 하지만 그 거리는 점점 늘어나고 연식이 오래된 엔진은 숨이 턱에 차오르고, 무릎에선 아우성을 찔러낸다.
‘그만해 주인, 이제는 배려 깊은 주인이 되었으면 해.’ 시큰한 통증이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스스로에게 타협의 메시지를 던진다.
“괜찮아 나와 가는 길이 다르겠지.”
느리게 걸어야 세상사가 보일 때가 있지.
단순 마음의 타협이 아니야.
천천히 느리게 보이는 세상도 한 번은 살아봐야 덜 억울하지.
괜찮으니 그렇게 천천히 매일 조금씩 가봐야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