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멸 또는 니힐리즘 그리고 향기
2024년 5월 6일 월요일 오후 9:01
나, 사람이 먹고 자고 움직이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해.
배고픔을 느끼고 졸리움을 느끼고 자는 중엔 뒤척거리고 오줌이 마려워 깼다가 다시 잠들고 하루 세 끼 먹은 다음날엔 푸지게 변을 싸고. 단순한 화학 작용으로 굴러가는 이 몸뚱이에 계속해서 연료를 주입해야 하고 불수의근에 의해 연장되는 생명에 무의식적으로 호흡하고 그렇기에 끊임없는 물리적 관심과 관리가 필요한 것에 염증을 느껴.
규칙적, 또는 일정하게 먹는 것이 싫다. 잠 자는 것이 싫다. 하지만 난 육체에게 지배되어 삶을 살아가는 기생적인 존재. 육체와 상생하지 않으면 둘 중 하나는 죽는다. 환멸이 난다. 신물이 나고 치가 떨린다. 내 몸뚱이에 붙은 이름조차도 지긋지긋하다. 이게 나라고 규정되어지는 것의 한계라니. 그렇기에 상생해야 한다. 갈고 닦아야 한다. 육체가 주는 행복은 그야말로 즉각적이고 확실하다. 먹고, 자고, 싸고, 오르가즘을 느끼고, 목이 탈 때 깨끗한 물을 섭취하는 것, 이러한 행복은 꼭 필요하면서도 한계가 있다. 참으로 한심하고, 무의미할 따름이다.
염세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한다. 고도로 발달한 기술과 경제시스템 덕분에 오염되고 파괴된 이 세상을 사랑한다. 다만 이 세상을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비록 오염되고 파괴되었을지라도 나를 빙 둘러싼 모든 것을 사랑한다. 하지만 인간이, 고작 인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잘난 체하며 사는 것이 싫다. 질투심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잘나게 살지 못해 질투심에 혐오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이 싫다. 동물이라는 사실이 싫고 동물만이 사랑을 하며 살 수 있는 것 마냥 좁은 시야각으로 연민에 찌들어 살아가는 꼴이 보기 싫다.
커뮤니케이션. 살아가는 이유로 소통을 모두 이야기한다. 가족과의 소통, 연인, 친구, 사제관계, 비즈니스 등. 오늘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내일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에 대한 설렘으로 매일을 먹고 자고 싼다고 한다. 소통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이유가 없는가? 그냥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존재의 이유가 불충분한가? 충분한 소통이 그 번잡한 모든 생리작용을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단 말인가?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이기에 이렇게 고통스럽게 다가왔다가, 거부할 수 없는 은은한 행복을 남기고 간단 말인가? 무엇이기에 이리도 추악한 모습을 보였다가, 끝이 없는 아름다움을 찬미하게 한단 말인가? 무엇이 우리를 이토록 동요하고, 절박하고, 개탄하고, 때로는 희약했다가 박장대소까지 하게 만드는 것인가? 나는 앞으로 그 무엇을 일종의 ‘향기’라고 표현하겠다. 여름 밤 사랑하는 이의 끈적거리는 살갗을 가만히 메만지다 보면 어느새 그 향기가 온 방 안에 퍼져 정신을 몽롱하게 할 때가 있다. 그 때 자신도 모르게 사랑을 속삭이게 되는 것이다. 음, 향기, 그 향기.
살아있다는 것은 곧 향기를 내뿜는 일이다. 아마 모두가 그 향기를 맡기 위해 살고 있는 것이리라. 아니 어쩌면 모든 동물은 어떤 향기를 감각하기 위해 생존하는지도 모른다. 그대가 맡고 싶은 향기는 어떤 향기인가, 그대가 내뿜는 향기는 어떤 향기인가,
나의 향기도 누군가에게는 삶의 이유가 될 것이라 생각하면 이 환멸감이 조금은 사그라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