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게임_J
"스윙이 망가졌네요." 지적이 날아들었다. 레슨 12회 차로 접어들면서 피니시 동작을 배웠는데 일주일여 혼자 연습한 결과 기존 스윙 실력마저 퇴보했다. 피니시 없이 4분의 3 스윙 연습단계까지만 해도 진도에 따라 배운 걸 곧잘 구현했던 것 같은데. 프로는 백스윙이 좋다고 평가했었고, 연습장에서 오며 가며 나를 보곤 했던 K도 "폼은 괜찮다"고 했었으며, 임팩트 때 클럽 헤드가 움직이는 방향인 '클럽 패스'도 대부분 바람직한 인 투 아웃(in to out) 궤도를 그렸었다. 그런데 팔로우스루에서 피니시까지 연결하면서 허무하게도 그나마 다져온 스윙 균형이 깨져버린 것이다. 아무래도 새로 배운 마무리 자세를 추가로 신경 쓰다 보니 익혔던 스윙이 망가지고, 클럽패스도 아웃 투 인(out to in) 궤도로 바뀌고, 비거리도 더 줄면서 순식간에 엉망진창이 돼 버렸나 보다. 진도도 더 나갔고 연습 시간도 더 늘어났는데 실력은 퇴보했다니…… 으악! 곤혹스러울 뿐이다. 알다가도 모르겠는 게 골프라더니, 기껏 들인 시간과 노력을 낭비한 기분이 들어서 울적해졌다. 어쩔 수 없이 피니시 없이 팔로우스루까지만 했던 4분의 3 스윙 단계로 다시 돌아가 연습 중이다. 드라이버로 40미터를 치건 50미터를 치건 비거리를 신경 쓰기보다 일단 안정적으로 인 투 아웃 궤도를 만들기 위해 다시 노력하자고 스스로 다독여본다.
이런 걸 두고 한 치 앞을 모른다고 하는 걸 거다. 단순히 생각하면 배운 게 늘어나고 시간과 노력이 쌓이면 실력 또한 전보다 좋아져야 하는데, 꼭 그렇진 않다. 노력을 쏟아도 자칫 방식이 잘못되면 오히려 상태나 상황이 나빠질 수도 있다. 삶은 언제나 크고 작은 변수들로 가득하다. ‘스윙이 망가졌다’는 사실이 마치 청천벽력처럼 다가왔다. 더디더라도 발전하고 있다고 믿으면서 필드 나갈 날을 꿈꿔왔단 말이다.
첫 레슨 때 나는 프로한테 물었었다. "골프 하면 운동이 많이 되나요?"라고. 기왕이면 다이어트 효과도 크면 좋겠다고 내심 기대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답변이 꽤 단호했다. "골프는 운동이라기보다 게임이에요, 재밌게 즐기는 거죠." 신체 어느 부위가 강화되고 열량 소모량이 어느 수준인지와 같은 대답을 기대했던 나는 순간 멍해졌다. 나는 시간을 내서 운동하는 노력을 기울일지언정 굳이 재미를 위한 게임에 탐닉하는 사람은 아니라고 스스로를 여겨왔기 때문이었다. K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종종 골프를 '운동'으로 칭하는 걸 듣기도 했다. 예컨대 "운동하세요?"라고 물으면 "골프 하세요?"라는 질문일 가능성이 높고, "이번 주말에 운동이 있어서…"라고 말한다면 "이번 주말에 라운드 약속이 있어서…”라는 뜻일 때가 많았다. 물론 골프가 꼭 엄청난 운동이라서기보다는 일종의 비즈니스 문화에 따른 화법임을 알고는 있었다. 어쨌거나 이전까지 나는 골프가 운동일 수는 있어도 게임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는 얘기를 하는 중이다. 그렇구나, 골프를 한다는 건 게임을 즐긴다는 얘기구나…… 내가 게임을 하기 위해 돈과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됐다는 사실이 어쩐지 낯설게 느껴지던 순간이었다.
게임의 사전적 정의는 "규칙을 정해놓고 승부를 겨루는 놀이"다. 더불어 "참가자들이 상대방의 행동이나 반응을 고려해 전략적으로 자신의 의사를 결정하는 상황"이다. 이처럼 규칙도, 승부도, 전략도, 의사 결정도 모두 게임의 주요 속성이지만, 게임의 가장 큰 의미를 꼽는다면 무엇보다 ‘놀이’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놀이에는 무엇보다 ‘즐거움’이 내포돼 있다. 새로운 걸 막 배우는 단계에서는 이해해서 직접 규정하기보다는 알려주는 규정대로 이해하고 시작할 때가 많다. ‘골프는 게임’이니 무엇보다 즐겁게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염두에 두고 나는 첫 레슨을 받았었다. 이후로도 의식적으로 즐거운 마음을 장착하고 연습하고 있다. 그러니 설령 갑작스런 난관에 봉착했더라도 즐기는 마음을 잃지 말아야지, 스윙이 망가졌더라도 그 망가짐마저 즐기자고 결심한다. 어차피 게임을 하려는 것 아닌가. 참가자가 너무 심각해지면 게임 본연의 취지가 퇴색된다. 삶도 게임처럼, 놀이처럼 살라는 흔한 비유를 알고 있다. 역시 마찬가지다 싶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어렴풋이 깨닫는다. 인생에서도 궁극적으로는 망가짐마저 즐길 수 있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는 걸. 더 어릴 때는 미처 상상조차 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인간이란 어느 시점부터는 육체적으로 서서히 망가져간다. 게임은 영원한 쳇바퀴가 아니다. 종료 시점이 있어야 게임이다. 그러니 뜻밖에 망가지는 일 또한 두려울 일도, 슬픈 일도 아니다. 기왕이면 소심한 게이머보다 대범한 게이머가 되고 싶다.
K가 앞서 써 둔 글을 읽다가 '도그렉 블라인드 홀'(Dogleg Blind Hole)을 알게 됐다. 이제 막 골프 게임의 기본을 익히고 있는 나는 아직은 꿈꾸는 연습생에 불과해서 본격 필드에서 마주할 크고 작은 어려움들을 아직 잘 모른다. 그래서 내가 미처 몰랐던 것들이 K의 글에 등장하면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찾아보고 공부한다. 아마도 게임 전략을 가늠해 보는 마음쯤 되는 것 같다. 도그렉 블라인드 홀은 페어웨이가 마치 개의 다리처럼 꺾여 있는 홀과 볼이 날아가야 할 그린이나 페어웨이 일부가 보이지 않는 홀이 합쳐진 개념이었다. K는 글에서 "눈으로 보지 않은 이상 확신을 갖고 샷을 하기 힘들다"는 경험을 털어놨던데, 언덕이나 장애물 때문에 볼이 떨어지는 위치를 직접 볼 수 없는 곳에선 그만큼 한 치 앞을 예상하기 힘들다는 얘기로 이해했다. 그렇지만 이게 바로 게임의 묘미가 아닐까 하고 나는 순진하게 생각한다. 다음을, 앞일을 모두 확신하고 예측할 수 있으면 과연 재밌을까? 더욱이 그게 실제 삶이라면 말이다.
디오니소스의 축복인 와인을 소재로 한 일본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는 저명한 와인 평론가가 유산으로 남긴 시가 20억 넘는 와인 컬렉션을 놓고 두 사람이 게임을 벌인다. 예수가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해 특별히 뽑았던 열두 명의 제자를 본떠 궁극적 경지에 도달한 12병의 와인 '사도'와 최고의 와인 '신의 물방울'을 찾는 대결이다. 주인공들은 종종 블라인드로 와인을 마신다. 와인의 이름과 가격을 전혀 모른 채 블라인드로 마시면, "그 와인의 본질에 다다를 때까지 집중해서 깊이 파고들 수 있다"는 대사가 나온다. 저자 타다시 아지가 워낙 감각적이고 현란하고 지극하게 와인 맛을 묘사하는 까닭에 만화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와인 한 잔을 따르고 말면서 이 대목을 음미했다. 블라인드로, 모른 채 마시면 본질까지 파고들 수 있다는 말을. 와인에 빗대 인생을 통찰해도 마찬가지 아닐까 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마주하기에 게임의 본질, 즉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것이다.
게임을 위한 나의 신조는 두 가지다. 현재에 집중할 것, 그리고 다음에 일어날 일을 호기심 어린 마음으로 기대할 것. 게임은 예측불허일 때 가장 흥미롭다. 모르는 게 맛이다. 그래서 좋은 쪽으로 기대할 수도 있다. 골프는 게임이다. 인생도 게임이다. 때문에 골프 또한 인생에 빗댄다. 아, 지금 내 스윙이 망가진 것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흔히 만나는 작은 고난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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