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당신은 누구의 갤러리인가요?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것_J

by JMJ

골프에서 ‘갤러리’는 경기를 관람하는 관중을 말한다. 대회에서 선수들의 경기 코스를 따라 걸으며 지켜보는 응원군. 골프에 아무 관심이 없을 때부터 나는 K의 갤러리였다. 따져보니 벌써 10년도 더 흘렀다. K는 종종 실외 레인지로 나를 데려갔다. 주말에 저 혼자 가기가 왠지 미안해서(?) 굳이 데려간 것 같다. 일단 가면 그는 볼 타격 연습에 빠져 무아지경 상태가 됐고 어차피 나는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자기 연습을 위해서 나를 꼬드겼던 것이다. ‘상쾌한 바깥공기, 자연이 얼마나 좋으냐… 내가 연습하는 동안 너는 앉아서 책 봐라… 끝나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뭐, 대충 이런 식이었다. 만약 그때부터 나도 골프를 했더라면 지금쯤 적어도 골린이 신세는 면하지 않았을까,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어쨌든 나는 본의 아니게 K의 연습 타석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서 그가 볼을 치는 동안 책을 봤다가, 저 멀리 날아가는 하얀 볼을 봤다가, 푸른 하늘을 떠가는 흰 구름을 봤다가, 가끔씩 그 성화에 못 이겨 K의 스윙 동영상을 찍어주면서 툴툴대곤 했었다. K는 특유의 장타 실력을 내 앞에서 은근히 과시했다. 연습 초반, 기다림에 지치기 전까지는 나도 대개 기분이 좋았다. 피톤치드가 묻어나는 청량한 바깥공기는 새 마음을 갖게 해 주니까. “오빠, 볼이 완전 멀리 가는데?” 식으로 칭찬이라도 해주면 K가 속으로 엄청 우쭐하는 게 눈에 다 보였다. 나는 칭찬에 그리 인색한 사람이 아니다. 누누이 말해왔지만 칭찬하는 것도, 받는 것도 다 좋아한다. 고운 말에 돈 드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 K도 나를 칭찬하라!)


그러고 보니 몇 달 전 어느 주말에도 나와 딸 서윤이는 K의 연습에 동행했다. 교외에 있는 한 실외 레인지였고, 내가 아직 골프 할 생각을 안 하던 때였다. K가 연습하는 동안 우리는 책을 보면서 기다렸고, 돌아오는 길에 뉴올리언스식 해산물 레스토랑에서 함께 밥을 먹었다. 그때도 K는 “잠깐 연습장 들렀다가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고 유도했던 것 같다. 아무튼 그를 따라 실외 레인지에 가곤 하던 시절에 나는 그야말로 '골프 문맹' 수준이었으므로 벤치에 앉아서 타석 위에서 볼을 날리는 K나 다른 사람들을 그저 멍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마치 우연히 들어간 갤러리에서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그림을 바라보듯이.



그랬던 내가 재밌고도 험난한 골프의 세계를 이제야 쪼금 알게 됐다. 마침내 K가 편애하는 한 세계의 문턱에 서서 안을 들여다본다. 좋은 것 중 하나는 K와 나눌 대화 소재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 유독 말과 글을 나누는 사이를 이상적으로 여기는 나는 K와 지금처럼 골프 얘기를 말과 글로 주고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꽤 맘에 든다. 언젠가 우리가 함께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스타 선수인 로리 맥길로이의 갤러리로 갔던 일을 K가 꺼냈다. 뭐? 내가 맥길로이를 직접 봤다고? 지금이야 골프 입문자로서 세계적 골프 스타 맥길로이를 모를 리 없지만 K와 함께 프로 골프 대회를 관람했을 당시에는 선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무작정 K를 따라갔었다. 그때도 분명 관람 후에 뭘 먹을지를 더 많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날의 푸른 잔디, 무수한 관중들, 호기심과 즐거움으로 상기됐던 K의 모습 등은 꽤나 선명하게 떠오른다. K는 자신이 흠모했던 맥길로이가 필드를 누비던 그날을 나보다 더 또렷이 기억할 거다. 2013년 충남 천안 우정힐스 컨트리클럽에서 열린 한국 오픈이었다. K는 당시 맥길로이가 준우승했다고 기억했다. 기사를 찾아보니 K가 맞다. 맥길로이를 따라다닌 갤러리였던 우리. 엄밀히 말하면 K는 맥길로이를, 나는 K를 따라다닌 날이었다. K는 맥길로이를 응원했고, 나는 K가 누굴 응원하든 그 응원에 그냥 동조했다.


늘 연습장 가는 K를 타박하곤 했는데 요즘엔 종종 함께 간다. 연습장에선 어차피 각자 연습하기 바쁘지만, 타석이 가까울 때면 틈틈이 서로를 흘긋 댄다. K가 나를 보는 것보다는 내가 K를 더 많이 보는 것 같긴 하다. 나는 못하고 K는 잘하니까, 잘하는 걸 동경하는 심정으로 말이다. K는 연습장에서 자신에게 몰입하는 스타일이다. 그럼에도 가끔씩 내 앞에 불쑥 나타나 훈수를 둔다. 티칭 프로 자격을 갖고 있는 실력자임을 인정하지만, K가 내게 이래라저래라 하는 건 왠지 참견같이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반항심이 인다. K는 내 앞에서 자신만만하다. "볼을 그렇게 치면 아무리 잘 맞아도 멀리 못 나가. 망치질하는 이미지를 갖고, 손목을 부드럽게, 헤드 무게로, 다운블로로 치는 거지. 볼 옆구리를 먼저 치고 그 앞 땅을 죽 긁고 지나간다는 느낌으로!" 칫, 말처럼 쉬우면 다 프로가 되겠네. 그게 말처럼 쉽지 않으니까 이렇게 헤매고 있지. 망치질해 본 적도 없는데 그 느낌을 어떻게 알겠어?...... 괜스레 심사가 뒤틀린다. K가 지켜보면 왠지 더 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오빠 할 일이나 해"라고 나는 쏘아붙인다. 물론 속으로는 K의 말을 떠올리며 연습해 보지만 역시나 잘 안된다. 못하고, 당황하고, 짜증 내고, 급기야 풀이 죽고 마는 나를 보는 K. K는 지금 나의 갤러리다. 맥길로이와는 비교도 안 되는 나를 지켜보면서 응원 아닌 응원을 보내주고 있음을 아는데 모르는 척한다.



골프에선 라운드를 같이 하는 사람을 ‘동반자’라 부른다. 보통 18홀 한 라운드에 4시간 넘게 걸리니 ‘함께 시간을 보낸다’는 말이 무색하지 않다. 프로 골퍼들의 경기가 아닌 이상 구름 같은 관중이 있을 리 없지만, 동반자들은 결국 서로의 갤러리가 아닐까. 조용히 지켜봐 주고 때때로 "굿 샷"을 외치며 힘껏 응원해 주는. 함께 긴 시간을 보내는 일인 만큼 라운드 동반자를 직접 선택했다면 아마도 서로는 서로에게 웬만큼 의미 있는 존재일 터다. K도 유독 좋아하는 지인들이나 친구들과 라운드 약속을 잡으면 한층 들떠 보인다. 요즘은 나도 첫 라운드 동반자로 누가 좋을까 떠올려보곤 한다. 아마도 긴장할 테니 무엇보다 함께할 때 마음 편한 상대면 좋겠고, K와도 함께 하려면 기왕이면 부부동반이 더 좋겠다. 친한 언니 Y가 생각나서 전화를 걸었다. 요즘 같은 문자 시대에 통화하며 수다 떨 수 있는 사이도 흔치 않다. Y와 나는 그림과 책을 좋아하고 술을 즐기는 취향 등 공통 관심사가 많아서 만나면 늘 할 얘기가 넘쳐난다. 이제 내가 골프를 배우면서 공유할 관심사가 하나 더 늘었다. 꼬리를 무는 궁금증으로 가득한 나를 Y는 이런저런 이야기로 한껏 북돋았다. "골프는 폼이 좋아야 돼", "그늘집에서 막걸리도 한 잔 마시고...", "헛스윙만 안 해도 성공이야", "나중에 해외 라운드도 같이 가자"는 둥 설렘을 키웠다. 마음껏 핑크 빛 꿈을 꾸다 불현듯 걱정에 휩싸인 내가 말했다. "근데 언니는 첫 라운드 때 몇 개 쳤어?" Y가 답하길, "셀 수도 없어." 내가 또 말했다. "어쩐지 캐디가 나 때문에 고생할 거 같아서 걱정돼." Y가 응수했다. "첫 라운드라 하면 캐디가 세지도 않아. 그러려니 할 테니 걱정 마." 휴……나는 다소 안도했다. 역시 Y는 이미 내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갤러리를 자처하고 있었다. 골프를 배우면서 동반자나 갤러리처럼 익숙한 말도 새롭게 익혀가는 느낌이다. 서로 삶을 겹쳐가고, 힘이 되는 격려와 응원을 주고받는 나의 사람들.


K와 나는 필드 밖에서도, 연습장 밖에서도 서로의 동반자이자 갤러리다. 때때로 별것 아닌 걸로도 동지에서 적으로 돌변해서 누가 더 잘났는지를 겨룰 때가 있지만, 험한 세상을 함께 헤쳐가는 끈끈한 전우라 여긴다. 몇 년 전 K가 선물로 준 백석 시집. 우리의 전우애를 다지는 멘트 끝에 추신으로 써 둔 글귀를 다시 읽어보니 좀 우습다. ‘P.S. 집에서 골프채 휘두르다 니 책상 조금 까졌다. ㅠㅠ’ 당시 나무 책상 한 귀퉁이가 벗겨진 걸 모르고 있었는데 이 시집을 받고서 알았다. 선물 주면서 고백했으니 뭐라 할 수도 없고…… 보니까 까만 사인펜으로 나무가 까진 부분에 그림을 그려놨더라는.



백석의 시 중에서 나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가장 좋아한다. “가난한 내가 /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자신이 나타샤를 사랑한 까닭이라 말한 시인 백석…… K도 나를 위해 하늘에서 눈이 내리게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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