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_J
“아네모네 꽃향기가 섞인 촉촉한 봄바람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자신의 손가락에서는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천재적 후각을 가졌지만 정작 자신의 체취가 없었던 사람에 대한 이야기. 책장 앞을 어슬렁거리다가 무심코 뽑아 든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단숨에 재독 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10대였다. 옛 시절 읽었던 책을 세월을 흘려 다시 읽노라면 그 시절 책을 읽던 어린 내가 설핏 떠오른다. 막연한 노스탤지어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존슨즈 베이비 로션이나 누크 크림, 니베아 핸드크림 따위를 쓰면서 거기서 나는 뽀얗고 포근한 향기를 유독 좋아했던 나는 ‘향수’라는 제목 때문에 책을 집어 들었었다. 정작 그 내용은 참으로 음울하고 충격적이었지만, 무취의 인간 그르누이가 순수하고 매혹적인 인간 체취를 탐한다는 역설이 어쩐지 슬프게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다시 읽어보니 책이 좀 더 슬퍼진 느낌이다. 그때보다 향기나 향수에 대해 좀 더 알게 된 어른이 됐기 때문일까…… 표현에 대한 갈망, 사랑받고 싶은 욕망, 무한한 재능의 결과가 인간의 광기와 생의 종말로 귀결되다니. 천재성을 겸비한 그르누이에게 사는 기쁨은 없어서 잔인하다. 물론 탁월한 작가의 상상력이 낳은 픽션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나 대로 밑도 끝도 없이, 재능이 인간을 얼마나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잠시 빠졌다.
“아네모네 꽃향기가 섞인 촉촉한 봄바람 냄새” 같은 걸 묘사한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반한 데다, 마침내 봄이 왔기에 온라인으로 아네모네 꽃을 주문했다. 비너스가 사랑했던 청년 아도니스의 죽음을 슬퍼하여 그 죽음 위에 신들의 음료, 향기로운 넥타르를 뿌려서 피어난 꽃이 아네모네라 했다. 그래서 꽃말은 ‘속절없는 사랑’. 애달픈 신화에 등장해서 더 신비롭게 여겨지는 꽃이다. 불멸의 신 비너스는 하늘에도 올라가지 않고 지상에서 인간 아도니스와 함께할 만큼 그를 지극히 좋아했다. 그러니 좋아하는 마음에 신의 재능이 더해져 피어난 꽃이 아네모네였던가.
살아가면서 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걸 알게 된다. 둘이 늘 상충하거나 대립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좋아하는 걸 잘하게 되거나, 잘하는 것에 애정이 커질 가능성이 높다. ‘나 이거 좀 잘해’라는 생각이 들면 자신감이 생기고, ‘나 이거 되게 좋아’라고 느낄 때면 행복감이 차오른다. 나는 말하고 쓰는 데 작은 재능 정도가 있는 것 같긴 하다. 물론 여전히 갈고닦는 중이고, 너무나 더 잘하고 싶다. 그리고 좋아하는 것이라면…… 이미 다 말한 것 같다. 역시 말하고 쓰는 것, 또……책, 향수, 꽃, 그림, 음악, 와인, 위스키, 커피, 빵, 버터, 봄, 햇살, 산들바람, 별……. 음, 다 나열하려면 한 페이지를 꽉 채워도 부족할 것 같아서 여기서 스톱. 하나만 더 덧붙이자면, 앞으로는 골프도 점점 더 좋아지지 않을까? 기대된다.
망가진 스윙을 복구하는 연습 끝에 어쩐 일인지 드라이버 샷이 잇따라 100미터를 넘겼다. (나로서는 발전한 비거리다!) 어머, 마침내 내가 잘하게 된 걸까? 못하던 걸 조금이라도 잘하게 됐을 때 맛보는 성취감은 곧 기쁨이다. ‘하면 된다’는 식의 무구한 믿음을 확인하게 될 때 나는 비교우위에 있는 재능을 발견했을 때보다 더 기쁘다. 그리고 경험상, 잘하게 되면 점점 더 좋아졌다. 언제부턴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을 매한가지로 여겨온 까닭이다. 그래서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중에 뭘 해야 하느냐’는 식의 흔한 화두 자체에 나는 다소 회의적이다. 좋아하지 않는다면 과연 얼마나 잘할 수 있으며, 잘할수록 좋아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라는 의문을 품고 있다.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이상, 장인의 경지에 이르는 탁월함은 좋아하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을까. 노력하는 만큼 잘하게 되고, 잘하게 되는 만큼 좋아지고, 좋아하는 만큼 더 노력하게 되는 선순환의 원리를 나도 조금은 체득한 것 같다. 그래서 골프 역시 마찬가지일 거라고 앞서 짐작한다. 잘하게 되고 더 좋아하게 될 날을 꿈꾸고 있다.
천재성이나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다 해서 사람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좋아하는 게 많을수록 기쁨이 크다는 건 웬만큼 자신할 수 있을 것 같다. 미리 전제하자면, 기쁨이 크다고 슬픔이 없거나 적지는 않다. 오히려 큰 기쁨을 느껴본 만큼 예기치 않게 맛보게 될 슬픔도 클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볼이 내내 잘 맞다가 갑자기 안 맞으면 그 상심이 얼마나 큰가 말이다. 기쁨은 슬픔과, 소유는 상실과 맞닿아 있다. 그럼에도 나는 좋아하는 마음을 쏟을 대상이 점점 불어나는 인생이면 좋겠다. 기쁘다가 슬퍼지고, 가졌다가 잃어버리더라도 좋아하는 마음을 심드렁한 마음과 바꾸고 싶진 않다. 좋아하는 마음이 현재에 머물면 행복이고, 과거로 기울면 향수이며, 미래로 향하면 욕망일 것이다. 나는 행복을 추구하지만 삶에는 향수도, 욕망도 필요하다고 여긴다. 앙드레 지드는 “소유보다는 욕망 그 자체가 나를 더욱 풍요롭게 해 줬다”라고 했고, 프랑수아즈 사강은 “자신의 향수를 감출 수 있는 작가는 없다”고 했다. 욕망과 향수는 ‘좋아하는 것’을 위한 다른 말이다. 물론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여긴다. 좋아하는 것을 늘리고 줄이는 건 지극히 취향의 문제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느 쪽인가?
나는 끊임없이 새로운 기쁨을 탐색해보고 싶다. 뒤늦게(?) 골프를 배우려는 시도도 궁극적으로는 기쁨을 구하는 마음에서 비롯됐다. 아이는 어른이 되어가며 자신도 모르게 기쁨에 대한 갈망조차 잃어버리는 것 같다. 내가 때때로 유년과 학창 시절을 돌아보며 향수에 젖는 건 그때 내가 꿈꿨던 기쁨을 그리는 마음이다. 언제나 새롭게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싶다. 일도, 골프도 점점 더 잘해서 점점 더 좋아하고 싶다. 나의 향수가 배어나는 나의 글도 오래오래 쓰고 싶다. 결국 삶은 좋아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좋아하는 것을 위한 삶은 향기로울 것이다.
K는 골프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다. 허구한 날 집에서 골프채를 휘두른다. 그러니까 ‘빈 스윙’, 볼 없이 스윙 연습을 한다는 얘기다.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필드가 아니더라도, 연습장이 아니더라도, 볼이 없더라도 동작을 연습하고 클럽을 휘두르는 것 같다. 나는 아직 그 마음의 경지까지 도달하진 못했다. 빈 스윙은 초보자인 내게 더욱 필요한 연습임에도 나는 아직 볼 없이 스윙 동작을 연습하는 습관이 붙지 않았다. K와 나의 큰 차이다. 아무래도 나는 아직 K만큼 골프를 좋아하지는 않는 것이다. 물론 K는 나름 재능도 있어 보인다. 좋아하는 마음에 재능이 더해졌으니 ‘제2의 인생’(?)에선 골프로 열매를 얻을지도 모를 일이다. 잘해서 더 좋아하고, 좋아해서 더 잘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행운이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여러모로 설득력이 있다. 삶을 기쁘게 만드는 설득력. K가 골프를 할 때 기쁨으로 충만해진다는 걸 나는 안다. 물론 유독 볼이 안 맞은 날에는 슬픔으로 가득 차 터덜터덜 귀가하는 모습도 많이 보았다. 아무튼 나도 이제 골프를 좋아할 참이다. 조금이라도 잘하고 싶으니까. 좋아하고 싶은 게 하나 더 생겨서 삶의 기쁨도 하나 더 늘었다. 다만 골프라는 것은, 좋아하면 얼마나 잘하게 될지…… 현시점 나로서는 참으로 궁금하다. 지금 내게 골프는 욕망이고, 욕망은 곧 결핍이라지만, 그 결핍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재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좋아하는 것이 곧 삶의 기쁨’이라는 이른 확신과는 달리, 재능이 인간의 행복을 얼마나 좌우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살아봐야 알 것 같다. 붉은 아네모네 꽃이 도착했다. 화병에 정성껏 꽂아 뒀다. 열어둔 창문을 타고 들어온 촉촉한 봄바람에 은은한 꽃향기가 섞인다. 비너스의 사랑과 능력으로 탄생한 아네모네…… 기분을 좋게 한다. ‘Joie de Vivre’(주아 드 비브흐), 이런 게 ‘삶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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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이렇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유튜브('조민진의 웨이투고')에 새 영상도 업로드했어요~
많은 분들이 좋아하시는, F.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이야기입니다.
저의 '인생책' 중 한 권이기도 한데요,
채널 들르셔서 잠깐의 여유와 낭만을 함께 즐겨주시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
*유튜브 링크
https://www.youtube.com/watch?v=29jGnV08I7Q
*아, 브런치북 '어쩌다 골프' 2화에도 [위대한 개츠비] 얘기가 나와요!! ^^
https://brunch.co.kr/@waytogominjin/2
제 영상과 글이 맘에 드신다면,
구독과 좋아요.. 훈훈한 댓글로 ^^* 함께해 주시면 무척 행복할 것 같아요~
그럼, 설렘과 행운 넘치는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
민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