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닮아가다_J
런던 연수 시절에 두 차례,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 갔었다. 한 번은 엄마와 딸과 함께, 또 한 번은 남편과 딸과 함께였다. 에든버러성과 칼튼힐에 올랐고, 로열마일을 걸었고, ‘더 돔’ 레스토랑에서 느긋한 저녁을 먹었고, 스카치위스키를 샀고,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를 썼다는 카페 ‘엘리펀트 하우스’에 갔었다. 벌써 수년이 훌쩍 흘렀다. 만약 그때 내가 골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었다면 한 번쯤 골프 성지를 찾았을 수도 있겠다 싶다. ‘골프의 고향’으로 불리는 스코틀랜드까지 갔는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골프장 중 한 곳인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를 빼놓긴 아쉬웠을 테니까. 꼭 라운드를 하지 않더라도 일요일에는 모두에게 개방된다고 하니 찾아가 걸어 보기라도 했다면 좋았을 거다. 1400년대부터 골프를 친 곳으로 그야말로 역사적 명소다. 사람들이 골프에 여념이 없어 활쏘기 같은 군사훈련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왕 제임스 2세가 골프 금지령(1457년)을 내렸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곳이 스코틀랜드라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었다. 역시 앎은 관심을 따라온다. 시간이 흐른 만큼 나도 조금은 변했다.
돌아보니 런던 연수 전과 후로 나의 삶은 또 한 번 나뉜다. 16년 차 직장인으로서의 의무를 벗고 1년 간 런던에 머물면서 유유자적 경험하고 탐닉한 것들이 이후의 나를 그 전과 다르게 바꿨다. 삶에 옳고 그른 정답이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저 생각과 방식의 차이가 있을 텐데, 그때 경험 후로 나는 그 이전으로 똑같이 돌아가지 못하고 차이를 벌렸던 것 같다. 전과는 또 달리 살아보고 싶어서 다니던 회사를 일단 나왔었다. 런던에서 썼던 첫 책('모네는 런던의 겨울을 좋아했다는데') 서문에서 “나는 많은 순간 어느 정도는 긴장한 채 여기까지 온 것 같다”고 털어놨었다. 퇴사 후 3년여를 돌아보니 그간 퇴적돼 온 긴장의 지층들이 조금은 녹아든 것 같다. 나는 비로소 조금씩 유연해지고 있다.
요 며칠 오른쪽 어깨와 팔에 근육통이 생겨 연습장을 쉬었다. K는 "뭘 얼마나 쳤다고 근육통이야, 내가 스트레칭부터 하고 연습하라 했지?"라며 타박을 줬지만, 나는 내가 열심히 연습했음을 안다. 딴은 초심자로서 ‘연습장 분투기’마저 성실히 써내려고, 뒤땅과 탑볼 후 전해지는 충격에도 아랑곳 않고, 매번 새 마음으로 성실히 볼을 날렸다. 날 가르치는 프로는, 아프면 연습량을 줄이고 쉬어 가라고 했다. 맞다. 아프면 쉬어 가도 된다. 즐기자고 하는 것 아니었던가. 게임하려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나는 조금씩 유연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성취감에 목말라하며 긴장과 안도 사이를 오간다. 하지만 무엇보다 ‘잘 쉬는 법’을 배우는 것도 삶이 주는 중요한 과제임을 점점 깨닫는다. 잘 쉬는 방법을 안다는 건 자신을 달래는 방법을 안다는 얘기다. 생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하게 함께 할 오직 한 사람, 자신을 스스로 어르는 기술은 사는 내내 터득해 가야 할 무엇이다.
스스로가 자신에게 좋은 걸 줄줄 아는 ‘키다리 아저씨’ 역을 자처해야 한다. 진 웹스터가 쓴 ‘키다리 아저씨’는 울적할 때 읽으면 마음이 밝아지는 이야기다. 이런 문장은 새겨둘 만한다. "결승점에 도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별 차이가 없고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땐 이미 늙고 지쳐 버린 뒤예요. 저는 길가에 앉아 작은 행복들을 쌓아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주인공 주디는 위대한 작가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하더라도 언제나 작은 것에서 큰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한다. 작은 것에서 큰 기쁨을 느낄 줄 아는 것, 이것이 유연해지는 길이다. 아, 이 책에도 ‘골프’라는 단어가 한 번 나온다는 걸 발견했다! "비가 와서 골프를 칠 수 없었기 때문에" 체육관으로 들어갔다는 대목. 주디에게 나쁜 일이 연속으로 생긴 어느 날, 그것이 한 가지 나쁜 일이었다. 그렇다. 비가 많이 오면 골프를 칠 수 없다. 그런 날에는 상심 말고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리자. 비가 영원히 내리지는 않는다. 주디의 이런 다짐도 따라 기억해 둔다. “인생은 게임과 같은 것이고 저는 능숙하고도 정정당당하게 경기에 임할 겁니다. 만약 진다면 제 어깨를 으쓱하며 웃을 거예요. 물론 제가 이긴다 하더라도 그럴 거고요.”
실전 라운드를 앞두고 골프 이론을 익히고 실기를 연습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 틈틈이 인생을 관조한다. ‘나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라는 생각이 가장 많이 든다. 티잉 그라운드? 페어웨이? 그린? 아니면 벙커나 해저드? 글쎄, 사실 잘 모르겠다. 아니, 지금 당장은 알 수 없을 것 같다. 길고 긴 터널 속을 헤매고 있는 것 같지만, 먼 훗날 되돌아보면 오늘의 나는 어쩌면 그야말로 전진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설령 벙커나 해저드에 볼이 빠져버린 막막한 순간에도 멋진 샷은 불가능하지 않다. 굿 샷을 한다면 언제나 상황은 역전될 수 있다. 그린이 보이지 않는 블라인드 홀이지만 그래서 다음이 기대된다. 인생이 18홀이라면 나는 지금 몇 번째 홀에 와 있을까? 티 샷부터 퍼팅까지, 볼이 홀에 들어가는 순간 홀아웃이다. 다음 홀이 궁금하니 이번 홀도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홀아웃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척 맨지오니의 ‘필 소 굿’(Feel so good)을 들으면서 스코틀랜드산 위스키, 스카치 한 잔을 마신다. 고급 위스키가 아니더라도 나는 얼음이나 물을 섞지 않고 니트로 마시는 게 좋다. 강도 높은 증류주가 목을 태우며 내려간다. 다시 스코틀랜드에 가고 싶다.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의 사진을 본다. 구체적 목표도, 계획도 없지만 막연하게 그린다. 언젠가는 그곳에 내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K와 함께 올드 코스를 걷고 있지 않을까…… 거기서 위스키잔을 기울이면 좋겠다. 막연한 꿈이지만 오늘을 행복하게 만드는 동력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다. 이제 나도, 적어도 클럽을 쥘 줄 안다. 어드레스도 배웠고, 스윙도 연습 중이다. 나는 분명 조금 더 달라졌다. 어떤 식으로든 어제보다 조금 더 발전했다고 믿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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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안녕하세요. 조민진입니다.
벌써 20일이 훌쩍 지났네요. ^^
이번 글을 끝으로 브런치북 '어쩌다 골프' 연재를 모두 마칩니다.
(저는 다음 주 첫 라운드를 앞두고 있어요. 설마 처음부터 너무 잘하는 건 아니겠죠? ㅋㅋㅋ)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더 좋은 글로 인사드릴게요.
작은 행복^^* 많이 쌓아가는 하루 보내세요~!
민진 올림
P.S.) 제 유튜브('조민진의 웨이투고')에도 놀러 오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29jGnV08I7Q