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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프롤로그

Talking With GOD을 시작하며

by 죽림헌

이렇게 생각해 본다.

어쩌면 이 글이 내가 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닌지,

그럴 수도 있겠다.

일부의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신을 모독한다고 생각할 것이고,

일부의 사람들은 시원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또 일부는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분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일부의 사람들은 웃으며 재미있는 설정이네, 할 것이다.

이분들이 열린 마인드를 가진 분들로 중요한 분들이다.

세상을 긍정적 마인드로 보는 분들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열려있으니 분명 훌륭한 글을 쓰시는 분들일 것이다.


열심히 신을 믿고 기도하고 찬양과 찬미와 성의(헌금, 봉사)를 다 하시는 분들은 신께 영광을

올리기 위해 하는 것이라 한다.

그러나 신은 이미 영광 그 자체이다.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그 믿음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자들의 마음을 저 버리고, 외면하며

자신들의 이익과 필요에 따라 신께로 향한다면......


종교로 인한 전쟁은 지구의 기원을 알 수 없는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신을 전지전능한 분으로 믿고 열심히 기도하며 도와 달라고 기도하는 그 마음들,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고 참선을 행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마음들,

신의 영광을 위해서 행동한다는 사람들, 영광이 돌려졌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발전을 보면, 신을 향한 믿음으로 선을 행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한 분들에 의해

인류는 발전하였고, 그 믿음의 행함으로 신을 더욱 경외하게 하였으며 믿음이 전파되었다.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은 양보하지 않으며 입으로 행함과 믿음을 말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도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위함이며 나는 이렇게 신을 위하여 다른 사람에게 신의 믿음을 전도하였습니다.

라는 말만 가지고 신 앞에 나아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왜, 하고 의문을 가지는 마음으로,

당돌한 나는 신을 만나러 간다.

당돌한 나는 신께 답을 얻고자 간다.

나는 신과 대화하기 위하여 저승으로 간다.

꿈을 빌어,


여기서의 신은 다양하다, 각자의 믿음대로이다.

신라천년, 고려, 조선 합하여 거의 천년, 건국과 패망을 거듭하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신앙은

불교였다. 그러니 불교를 무시하는 것은 민족의 뿌리를 무시하는 것이다.


역사는 기억하자. 성리학의 유교는 종교가 아닌 사상이고 학문이었다.

불교와 학문인 유교를 경시하는 사람은 조상과 민족의 정신을 경시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반도의 역사와 정신을 지우개로 지우 듯하지 마시기 바란다.


라는 어쭙잖은 생각을 해보면서 글을 쓴다.


나는 인간의 대변인 자격이 아니라,

그냥 신을 믿었고 믿는 한 인간으로서, 신이 신의 상태에 있으면 우리는 단지 피조물의 자격 밖에 없으니,

잠시 신에게 인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세상일과 삶이 힘든 분들의 이야기로 대화를 하고자 한다.

신과 나의 대화이니 자신들의 믿음에 반한다고 화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상의 산물이고 창작의 글이다.

열린 마음으로 당돌한 여인이 신과 티격 태격하는 이야기를 읽고 미소 지으시길 바란다.

자신과 다르다고 다른 이를 비판한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간다.


브런치북을 만들면서 생각해 본다.

어쩜 살아온 날들을 생각하며 신에게 물어보고 싶은 나의 마음이 아닐까?

상당히 많이 이성적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그것이 맹목적이지 못한 이유다.

언제나 한발 뒤에서 왜? 무엇이? 어떻게? 하는 의문점을 스스로에게 남긴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쉽게 믿고, 빠지지 않는 나의 성격이다.




언젠가 TV에서 방영된 프로를 보았다.

제일 싫어하는 프로그램이, 무슨 고발성? 사회문제? 진실을 밝힌다는 프로다.

반대편에서 날벼락 맞는 그들의 말도 사심 없이 들었는가? 바르게 편집하였는가,

때론 피해자란 사람이 가해자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았을까 ,


방송내용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도와주려는 것인지 제도를 고발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궁금하지도 않다. 또 기획하고 있겠지, 그런 프로에 대한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화면에 한 나이 드신 분이 혼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모습이었다.

그분의 어떤 슬픈 삶을 취재하는 듯하였다.

매일 새벽미사를 빠지지 않고 다닌다고 하였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랍장위에는 성모상이 세 개 놓여있었고 묵주가 여러 개 놓여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 있으면서 속에서 울컥하는 마음이 생겼다.

얼마나 기도하였을까? 기도의 제목이 이루어졌을까? 저 연세에 무엇을 기도하였을까?

취재자가 나온 것으로 볼 때, 기쁜 일은 아니고 독거노인문제인 듯하였다.


성모상, 묵주 저렴한 가격이 아니다. 정부에서 나오는 수당으로 사시는 분에게는 가격이 벅차다.

만약, 저소득층이나 독거노인으로 지정되신 분이 아니라도, 역시 쉬운 가격이 아니다.

취재자의 질문에 그분은 자신이 산 것은 하나고 두 개는 버려진 것을 주워왔다고 하였다.


그때 참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는 믿음을 잃어버리고, 가톨릭신자에게 정말 소중한 성물인 성모상과 묵주를 쓰레기로 버렸다.

또 한 분은 그것을 소중히 주워 와서, 그 앞에서 묵주 기도를 한 것이다.


성모상을 버린 사람은 무엇에 얼마나 마음의 상처가 있었는지 쓰레기처럼 버린 것이다.

쇼핑백이든 무엇에든 처음 마음처럼 소중하게 담아 성당에 가져다 놓으면 되는 것을

그 수고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이 못내 마음이 아팠고,

그것을 주워와 그 앞에서 묵주기도를 올렸을 그분의 아음도 안타까웠다.


오래도록 그 취재장면은 나의 뇌리에서 빠져나가지를 않았다.

기획취재는 아닌 것 같았으나, 또 알 수 없는 일이다.


자식이 불치병이라는 진단으로 오래도록 경제적, 정신적인 이중 삼중의 고통 속에서 살았던 사람으로서

누구보다 간절한 기도를 많이 하였다. 하여 기도하는 자의 마음을 이해한다.


힘든 일이 있을 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고,

혼자 짐을 지고 조용히 길을 가는 사람이 있다.

나는 후자였다.





언제나 드는 생각,

당신은 누구신가요? 어디에 있나요?

당신은 우리가, 내가 고통받을 때 어디에 있었나요?

당신이 만드신 이 땅의 피조물들의 삶에 만족하시나요?

절박한 심정에 기도한 자녀들에게 어떤 대답이라도 하셨나요?

공평히 사랑을 주셨나요?


신들이 있었던 세상과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의 세상은 너무 다르다.

신이 우리를 만들었다는 그 시대가 아닌, 끊임없이 진화하여 우주로 가고, 기계인간도 만든다.

생로병사(生老病死)에서 生의 비밀은 이미 해결하였다. 시험관 수정, 체외수정으로, 老化도 지연시킨다.

病듦도 어느 정도 해결한 부분들이 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死, 과연 해결하였을까? 모르겠다.


이 시점 뜬금없이 등장하는 동양의 운명론, 요즈음은 철학으로 분류한다고,

갑자기 神을 넘어서는 논리다. 무척 기분 나쁘다.

우린 어떤 방법으로든 믿음을 가지고 신을 믿으며 삶을 살기 때문이다.

운명론은 삶을 한정(限定) 지어 버린다.


그런 여러 이유로,

의문점을 못 참는 당돌한 여인이 신을 만나러 가서 신과 대화(talking with GOD)한다.

물론 꿈을 통하여,


신을 믿고 기도하는 힘든 그대여,

그것이 무엇이든 그 어느 것도 당신의 잘못은 아닙니다.




이제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신과 대화해 보시길...


*이 창작글은 역시 <주머니~> 시리즈에 들어 있던 것이다.

이번글들은 댓글 창을 닫습니다.




#신과 나 #신과 대화 #믿음 #종교 #기도의 응답 #신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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