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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막 굿닥터

삶이 희극이 되는 순간, 우리는 조금씩 회복된다!

by 플레이런너

1장 나의 첫 번째 굿닥터

“꽝”

군포 사거리. 어둠이 짙게 내려앉고 빗줄기가 유리창을 때리던 밤, 내가 운전하던 대우자동차 맵시가 신호 대기 중이던 택시 뒤를 박았다.

순간 너무나도 놀랐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운전대를 부들부들 떨며 꽉 잡았다. 초보운전 열흘째, 왜 하필 오늘 이런 실수를.

운전석에서 키가 160cm 정도로 보이는 택시 기사가 나왔다.

“운전을 도대체 어떻게 한 거요?”

승객도 따라 나왔다. 안경 낀 정장 차림의 사내가 오른손으로 목을 감싸 쥐며 내 쪽으로 비틀거리듯 다가왔다. 몸을 제대로 펴지도 못한다.

“아이고, 목이야…”

‘덜컹’하고 겁이 났다. 차를 확인하니 내 차 범퍼는 앞부분이 충돌로 인해 심하게 파도치듯 찌그러졌다. 택시 뒷범퍼도 손상이 있지만 긁힘이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승객은 과장된 몸짓으로 고통을 호소했다.

“직업이 뭐요?” 택시 기사가 물었다.

“학생입니다”

“학생? 돈도 없겠구먼? 그럼 내가 최대한 학생 편에서 생각을 해볼게요. 그럼 우리 회사로 갑시다.”


택시 기사는 나를 회사 사무실로 안내했다.

짙은 브라운색 책상과 소파가 놓인 사무실 한가운데 사장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묘하게 낯설지 않은 느낌이다. 어디서 봤지? 순간 떠올랐다. 그 모습은 마치 우리가 연습 중인 『굿닥터』 속 ‘재채기’ 장관실의 무대 같았다.

연극 속에서 이반은 재채기 실수를 만회하려고 장관실에 들어간다.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사장의 모습은, 바로 그 장면 속 장관과 꼭 닮아 있었다.

내 맞은편에는 택시 기사와 승객이 사장을 향해 서 있었다. 택시 기사가 사장에게 공손하게 말한다.

“사장님, 사고를 낸 사람이 바로 이 학생입니다.”

“학생? 부모님께 연락했어요? 부모님 없이는 안 돼요.”

사장의 첫마디였다.

“부모님은 지금 집에 안 계십니다.”

부모님께 알리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말했다.

“부모님이 와야 사건이 해결돼요. 학생 혼자선 안 돼”


나는 형이 운영하던 S광고기획사를 도우며 일종의 아르바이트처럼 ‘씨앗’ 공연 『굿닥터』의 포스터와 팸플릿을 수원 문화대학교에 납품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사실 택시 회사에 도착하기 전 나름 비상 대책을 세우며 왔다.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공중전화로 씨앗 동기 H에게 전화를 걸었다.

“혹시 백만 원 정도 융통할 수 있어”

“응, 알았어"

합의를 위한 준비 자금이었다. 다행히도 친구가 큰돈인데도 구해줄 수 있다고 하니 마음을 조금 놓고 있었다.

“아이고, 내 목이야… 미국 출장, 진급… 학생이 내 인생을 망쳤어요! 병원 가야 해요, 지금 당장!”

택시 승객이 갑자기 돌변했다.

“나 이번에 미국 출장도 잡혀 있고, 회사 진급도 달린 건데! 내 인생을 직장에 다 걸었다니까. 겨우 기회가 왔는데, 이 사고 때문에 병원에 누워버리면 출장도 못 가고, 진급도 날아가잖아. 학생이 그걸 책임질 거야? 아이고, 목이야!”

그는 점점 목소리를 높이며 마치 웅변하듯 떠들어댔다.

택시 회사 사장까지 가세했다.

“부모님! 부모님 없이는 안 돼. 학생 혼자선 안 된다니까. 부모님 모시고 와.”

승객은 여전히 목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내 출장! 내 진급! 내 인생이 끝났다니까요!”


그 목소리는 차라리 무대를 향한 대사 같았다. 형광등 불빛 아래 책상이 갑자기 『굿닥터』 중 「의지할 곳 없는 신세」에서 지배인의 사무실처럼 보였다. 그의 과장된 몸짓은, 어젯밤 연습실에서 보았던 인물들이 그대로 걸어 나온 듯했다. 나는 문득 관객처럼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러나 여기는 연습실도 아니고, 무대도 아니었다.

여기는 택시 회사 사무실이었고, 나는 초보운전 사고 가해자였다.

그들은 끊임없이 돈 이야기를 꺼냈다. 사장은 시종일관 부모님에게 연락이 되었는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나는 준비해 둔 백만 원을 떠올렸지만, 그들이 원하는 건 그게 아니었다. 합의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부모라고 판단하는 것이었다.

“택시 수리비에다 운행을 하지 못하는 손해 비용, 차 수리비, 병원비까지 치면 적어도 오~육백만 원은 들 거야.”

택시 사장의 말이었다.


사실 나는 그렇게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겉으로 봤을 땐 택시가 조금 긁혔을 뿐 멀쩡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내 능력으로는 이 상황을 더 감당할 수 없었다.

나는 짧은 침묵 후 말했다.

“경찰서로 가시죠.”

택시 사장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학생, 경찰서 가면 불리해집니다. 부모님도 불러와야 하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감수하겠습니다.”

군포에서 가장 가까운 안양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서 사고경위서를 작성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사실 그대로 적었다.


사고경위서

사고명: 군포 사거리 교차로 추돌사고

일시: 1990년 3월 20일 19시 30분경

장소: 경기도 안양시 동안구 호계3동 교차로

관련자: 김혁진(본인, 운전자), 김정진(상대차 운전자), 이영철(택시 동승자)

사고 내용 및 경위:

문화대학교 경제학과 4학년 학생. 인쇄물을 납품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경수산업도로를 이용해서 서울로 가는 길이었음. 비가 많이 내리는 저녁에 나는 군포 교차로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택시를 운전 미숙으로 미처 보지 못하고 충돌함.(초보운전, 운전 10일째) 사고 후 즉시 택시 회사에서 합의를 보려고 한 시간 정도 대화를 했음. 합의 불발.

피해 내역 및 조치: 내 차량 앞 범퍼 심하게 파손, 상대 차량 뒷 범퍼 약간 긁힘 및 소량의 파손. 택시 승객(뒷목과 머리가 아프다 함)

작성자: 김혁진


사고경위서를 받아 든 경찰은 내 쪽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 사건 내용을 아주 일목요연하게 잘 적었네요.”

경찰이 내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자, 택시 사장이 서둘러 끼어들었다.

“우리 기사도 지금 많이 아프다고요. 당장 병원에 입원해야 돼요.”

“사고 경위서 작성하고 가세요.”

잠시 후, 택시 사장이 종이를 들고 와 경찰에게 내밀었다.

“사장님, 여기는 병원이 아닙니다. 사건 개요를 적는 경찰서라고요. 그런데 아프다는 얘기밖에 없잖아요. 다시 써오세요.”

사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펜을 들었다.

그 사이 승객은 또 목을 부여잡고 소리쳤다.

“내가 이번에 미국 출장! 내 진급! 내 인생! — 학생, 책임질 수 있습니까?”

경찰서 안에서도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했다.

사장이 다시 종이를 내밀자, 경찰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저 지금 바쁘거든요. 이거, 아까랑 똑같잖아요? 다시 써오세요. 여기가 자동차 공업사예요? 택시 수리비만 잔뜩 적어놨잖아요. 그런 건 나중에 보험사랑 얘기하시고요.”

택시 회사 사장이라 사고 경위서 작성은 식은 죽 먹기일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 밖이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경찰은 내 쪽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택시 사장은 사건 경위서를 다시 쓰느라 곤욕을 치르는 듯했다. 분주하게 사무실을 오가며 전화를 걸었다.

그 사이 나는 경찰에게, 사고 경위서에는 담지 못한 택시 회사에서의 상황을 차근차근 들려주었다.

“사건은 접수됐으니 학생은 이제 편안히 귀가하세요.”

경찰은 웃는 얼굴로 친절히 말했다.

“하지만 병원에 입원한다고 하는데요.”

“학생은 저 사람들 말에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도의적으로 인사를 하고 싶으면 나중에 병원 면회나 한번 가든지. 안 가도 되고. 사건은 접수됐으니까. 이제부터는 보험회사가 학생의 변호사 역할을 합니다. 학생은 공부나 해요. 집이 서울인데 어서 가봐요.”

경찰관의 호의적이었고, 상식적으로 일을 처리했다.

'학생은 공부나 해요' 라는 그 말은 단순한 상황 설명이 아니었다. 사고를 오직 ‘죄’로만 여기던 내게 처음으로 등을 토닥여 주며 건넨 위로이자 회복의 언어였다. 마치 『만선』 공연 때 국립국악원 담당자가 나에게 국악인 김영동을 알려주었던 것처럼 다정하고 따뜻한 배려였다.

그는 나의 첫 번째 ‘굿닥터’였다.

짙은 어둠 속, 늦은 밤. 나는 경찰서를 나섰다.

굿닥터 공연을 며칠 앞둔 시점이었다.


2장 굿닥터, 무대에서 건넨 위로

다음 날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동기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봤다. 누군가가 물었다.

“어제 일은 어떻게 된 거야?”

나는 어젯밤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과, 택시 승객이 목을 부여잡으며 소리치던 모습을 흉내 내며 설명했다. 연출 L이 갑자기 웃으며 무릎을 쳤다.

“야, 그거 완전 굿닥터네. ‘의지할 곳 없는 신세’에 나오는 캐릭터잖아. 네가 한번 직접 해봐.”

나는 머리를 긁으며 머뭇거리다 뒷목을 잡았다.

“아이고, 내 진급! 내 출장! 학생이 내 인생을 망쳤어요!”

고개를 젖히며 비틀거리자, 연습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어젯밤, 내겐 두려움이었던 장면이 아이러니하게도 오늘은 모두를 웃게 만드는 희극으로 바뀌어 있었다.

군에 있을 때, 나는 동기들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군복무의 답답함 속에서 우리는 같은 다짐을 적었다.

“제대하면, 우리끼리 꼭 연극을 하자.”

약속대로 제대 후 첫 학기, 네 명이 다시 모였다. N은 ‘씨앗’의 회장이었고, L은 『도적들의 무도회』를 흥행시킨 기획자였다. H는 조명에 대해 누구보다 빠삭했다. 그리고 나는 4학년 복학생으로, 다시 무대에 돌아왔다.

우리가 선택한 작품은 닐사이먼의 희곡 『굿닥터』였다.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단편 소설들을 기반으로 한 옴니버스 형식의 단막극 모음이다. 주인공 작가가 관객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구조로, 재채기, 치과의사, 물에 빠진 사나이, 오디션, 의지할 곳 없는 신세, 생일선물 등 여러 에피소드가 이어지며 인간의 우스꽝스럽고 연약한 면을 유머러스하게 그려낸다.

짧은 단막들이 모여 한 편의 희극을 이루는 작품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겐 단순한 희극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달래주고, 웃음을 통해 다시 살아갈 힘을 건네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기획은 손재주가 뛰어나고 연출과 밥심을 자랑할 정도의 책임감과 성실함이 보증 수표 같은 후배가 맡았다. 틈만 나면 이 후배는 나를 만났다. 기획 때문에.


연출과 동기들은 “혁진이는 4학년이니까 무대감독을 맡는 게 좋겠다”라며 나에게 ‘있어 보이는’ 직책을 제안했다. 사실상 역할이 남지 않아서 배정된 자리였지만, 연출이 나에게 배려해 준 전략적 스텝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마저도 감사히 받아들였다.

무대 만드는 날, 톱질과 못질을 해본 적 없는 나는 연습실을 서성거리며 막걸리와 안주를 나르기 바빴다. 회장 N은 줄자와 연필 뒤꽁무니의 지우개로 합판 위에 번개처럼 선을 긋고, 연출 L은 “여기 600, 여기 1200, 못은 30 간격”이라고 리듬을 탔다. 나는 그 리듬에 맞춰 막걸리 종이컵을 돌렸다. 못은 통에 부딪혀 딸깍딸깍 소리를 내고, 망치는 합판 속으로 낮고 둔탁한 박자를 새겨 넣었다. 그때의 나는 망치를 잡는 법보다 컵을 덜 쏟는 법을 먼저 배웠다. 손재주 좋은 회장 N과 연출 L, 그리고 후배들이 못과 망치를 쥐고 뚝딱 세트를 완성하는 동안, 나는 그저 옆에서 지켜보며 말 그대로 감독만 했다.

연습이 진행되면서 하나의 숙제가 생겼다. 각 장의 제목을 어떻게 관객에게 알릴 것인가?

의견은 다양했다.

“슬라이드로 스크린에 비춰주자.”

“도화지보다 큰 화보판을 들고 라운드걸처럼 지나가는 건 어때?”

“마당극처럼 징을 치면서 제목을 외치면 재미있겠다.”

결국 마지막 아이디어로 결정이 났고, 그 징은 내 몫이 되었다.


공연 날, 내 자리는 객석 맨 앞, 중앙 통로 옆이었다. 나는 장마다 징을 크게 울렸다.

“제1장, 재—채—기!”

처음 밤하늘을 가르던 건 ‘꽝’ 하고 울린 차 충돌음이었다.

그리고 며칠 뒤, 무대 위에서 내가 울린 징 소리가 객석을 울렸다.

하나는 두려움이었고, 하나는 시작의 신호였다.

그 두 소리는 닮아 있었고, 지금 돌아보면 모두 나를 일으켜 세운 소리였다.

청명한 쇳소리가 울릴 때마다 관객의 시선이 무대 위로 쏠렸다. 징 소리는 공연의 흐름을 이어주는 신호이자, 분명 공연의 일부였다.

그날 무대에 선 배우들은 놀라울 만큼 몰입해 있었다. 작가 회장 N, 일 년 후배 C, 그리고 재학생 3인방은 주요한 역할들을 맡아, 희극답게 과장된 연기를 그럴듯하게 소화해 냈다.

특히 ‘지배인’을 맡은 후배 C는, 내가 전날 보여준 택시 승객의 몸짓처럼 몸을 크게 흔들며 고통을 표현했다.

목덜미를 움켜쥐고 비틀거리며 무릎을 꿇듯 주저앉았다.

“아, 내 머리카락이 다 빠진다… 내일 또 온대… 내일 또 온대…”

그 대사를 할 때마다 손을 부르르 떨며 머리카락을 뜯는 시늉을 했다.

그 대사에 객석은 폭소로 터졌다. 무대 위에서 한 사람의 고통이, 연극이라는 형식을 통해 모두가 공감하는 웃음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공연 중, 갑자기 한 사람이 무대에 난입하듯 헐레벌떡 뛰어 들어온다. 그는 잠시 숨을 고르고 객석을 둘러본다. 진지한 표정을 짓고 관객을 향해 묻는다.

“여기… 정치학 수업 아니에요?”

순간 당황했던 관객들의 반응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무대의 조명이 바뀌고 세트가 전환된다. 그제야 관객들은 상황을 눈치채고 폭소를 터뜨린다.

연출의 아이디어였다.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현실과 극의 경계를 흐리려는 의도였다.

무대 앞에서 그 장면을 지켜보던 나는 전날 밤의 경찰관을 떠올렸다.

“학생은 공부나 하세요.”

그 말은 꾸짖음도, 훈계도 아니었다. 낯선 위로였다. 사고를 죄처럼 느끼고 있었던 나에게 그 말 한마디는 상황을 실수일 뿐인 사건으로 돌려놓았고 스스로를 용서하게 만들었다.

나는 깨달았다. 현실에서 받은 위로는 무대 위에서 웃음이 되고, 웃음은 다시 또 다른 위로로 돌아간다는 것을. 관객의 웃음은 내게, 이제 그 사고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신호처럼 들렸다.

삶은 때때로 비극처럼 덮쳐온다. 그러나 무대에 올려 보면 그 비극은 희극으로 방향을 튼다. 함께 무대를 만든 친구들, 객석을 채운 관객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어둠의 밤을 건너온 나 자신에게 나는 조용히 말한다.

그날 손바닥에 떨림을 남기던 징처럼, 작은 역할 하나가 인생의 바늘 방향을 바꿀 때가 있다.

그 밤의 ‘꽝’ 소리도, 그 뒤의 웃음도, 모두 나를 만든 장면이었다.

이제 나는 누군가의 곁에서 조용한 울림이 되는 ‘굿닥터’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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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