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깊은 여운
제1장 ‘곰치’가 되지 못한 날
“혁진아, 곰치 해라”
씨앗의 5월 학술제 공연 작품은 천승세 작의 『만선(滿船)』으로 정해졌다.
연출을 맡은 S형이 내게 배역을 제안해 왔다.
곰치? 주인공을?
평소 나에게 멘토 같던 형의 권유였기에 그 말은 더 의미 있게 다가왔다.
‘드디어 나에게도 주인공 제안이 오는구나.’
실로 씨앗 공연 일곱 번째 만에 찾아온 뜻밖의 기회였고 놀라운 반전이었다.
무척 기뻤다.
늘 무대 밖 연기자로 불리던 내가 이제는 무대 위에서도 인정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제야 나도 연기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곧장 『滿船』 대본을 집어 들었다.
줄거리는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滿船』을 꿈꾸는 한 가족이 배를 띄우지만, 바다는 끝내 그들에게 풍요를 허락하지 않는다. 고된 노동과 죽음의 그림자만이 남고, 희망은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는 내용이었다.
읽다 보니, 주인공 곰치의 대사량이 상상 이상으로 많았다. 전라도 사투리에 묻어난 감정의 깊이와 폭도 생각보다 훨씬 컸다. 대사가 눈으로는 잘 들어왔지만, 마음속으로는 쉽게 와닿지 않았다.
‘내 입에서 곰치가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그 불안이 점점 커지면서, 자신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형, 제가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서요.”
“이 연극에서 발음은 안 중요해. 그냥 몸으로 상황을 보여주면 돼”
“정말요?”
"우선 넌 덩치가 딱이야. 그 어눌한 말투도 곰치랑 잘 어울려.”
나랑 잘 맞는 배역이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을 읽는다는 소릴 듣던 내가 말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자꾸만 같은 생각이 맴돌았다.
‘이렇게 대사가 많은 주인공 역할을 내가 정말 해낼 수 있을까?’
누구보다 자신감 넘치던 나였지만, 이번에는 선뜻 답을 하기 어려웠다. 평소 같았으면 망설임 없이 무조건 ‘하겠습니다.’ 했을 텐데 말이다.
“형님, 이번에는 좀 쉬겠습니다. 형님이 연출하는 데 도움이 못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이해 부탁드려요."
'씨앗'에 입회한 후 여섯 번의 공연을 마라톤을 하듯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했다. 이번엔 잠시 숨을 고르고 싶었다. 학점 걱정 때문은 아니었다. 공부는 애초에 할 생각도 없었으니.
그보다는, 연극 연습에 직접 참여하지 않으면서도 가끔 들러 "잘해라, 수고 많다" 한마디 건네고, 후배들 어깨 두드려 주고, 술 한잔 사주며 폼 잡는...
그런 선배 역할을 한 번쯤 해보고 싶었다.
며칠 후 학교 앞 주점에서 연출S형과 몇몇 선배들이 모였다. ‘씨앗’의 컨설턴트이자 교섭의 달인 C형이, 나를 빤히 보며 웃었다. 그리고 한마디 던졌다.
“만선은 무슨, 배 띄우기도 버거운 판이라며. 거기다 이번 공연에 중추 하나가 뒤로 돈다며, 이거 항해가 되겠어?”
순간, 그 말이 나를 향한 것임을 직감했다.
C형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덧붙였다.
“배우도 부족하고 스텝도 턱없이 모자라. 그래도 공연은 올라가야 하지 않겠어?”
그가 내 오른손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이 형은, 정말이지 타인을 설득하는 데는 천부적인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
"혁진이가 참여하면 회비 안 걷고 오늘 술값 내가 다 낸다.”
평소 철저하게 회비제를 주창하던 C형이 그날따라 낯선 표정으로 술을 돌렸다.
다들 말은 없었지만, 그의 파격적인 제안에 어딘가 들뜬 기운이 감돌았다.
분위기는 조용했지만, 마치 암묵적인 환호가 방 안을 가득 채운 것 같았다.
이윽고 형이 내민 술잔에 난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음향을 하겠습니다."
제2장 소리의 여정, 무대 위의 울림
어떤 공연이든 관객이 자리를 채우고 시간이 되면 무대의 불이 꺼지고 음악이 흐른다. 마치 정해진 공식처럼.
서곡이란, 공연의 문턱에 놓인 음악이다. 극장 불이 아직 꺼지지 않았지만, 음악이 흐르는 순간, 객석의 잡담 소리는 지워지고 마법처럼 관객을 현실에서 떼어내어 무대의 세계로 이끈다. 관객의 귀를 두드리고 감각을 열어놓는 것이다. 나는 만선의 무대에 관객을 초대하기 위한 서곡으로, 베토벤 교향곡 5번, 그 마지막 4악장을 골랐다.
묵직하면서도 비장하고,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긴장감, 이 곡이라면 충분했다.
마음속으로 ‘이거다’ 하는 생각에 기세 좋게 연습실인 소극장으로 달려갔다. 흥분된 마음으로 무대를 상상하며 음악을 틀었다.
"자식아, 이거 아니야 "
연출을 맡은 S형의 반응이었다. 마땅한 설명도 없다. 그냥 아니라는 말만 반복됐다.
‘대체 뭐가 아니지?’
답답한 마음에 나는 다시 만선의 배경을 떠올렸다. 그리고 공연에 어울릴 판소리 몇 대목을 골랐다. 그중 안숙선 명창의 ‘뱃노래’는 흥겨운 뱃사람들의 노동요로 어촌의 배경과도 맞고 전반적으로 어두운 분위기를 밝은 톤으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며칠 후, 소극장에서 연출인 S형에게 새로 준비한 판소리 선율을 들려주었다.
"아니!"
말은 더 짧아졌고, 표정에는 짜증이 섞였다.
내가 곰치를 거절해서 저러는 건가? 그러면 좋겠다. 차라리 곰치를 맡을 걸 그랬나?
객석에서 바라보니, 키 큰 후배가 하는 곰치가 괜스레 탐났다. 그 녀석은 무대 위에서 거칠게 소리를 지르며 그물을 던지는 장면에서, 마치 진짜 어부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나였다면 그 감정을 어떻게 표현했을까?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어차피 공부도 안 하는데 주인공을 할 걸 그랬나’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뭔데요?”
“관객의 마음속 어딘가가 흔들려야 해.”
그 말에 나는 멈칫했다. 결국, 『滿船이 담아내야 할 그 깊은 울림과 몰입을 다시 고민해야 했다. 그가 떠올리고 있는 그림이 어렴풋이 짐작은 된다. 관객을 바다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첫 파도처럼 숨 쉬고, 긴장하고, 무너지는 울림을 경험하길 원하고 있다.
문제는 그런 소리를 어디서, 어떻게 찾아야 하느냐다. 그렇게 골몰하던 중 얼마 전 남산 국립극장 갔을 때 바로 옆에 위치한 국립국악원이 떠올랐다.
하필이면 수업 시간이었다. 눈은 칠판을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온통 『滿船』음악뿐이었다.
수업이 끝나자 혼자 무턱대고 남산으로 갔다. 국립국악원 1층 입구에서 물으니 ‘국악연구실’로 가보란다. 담당자 책상 앞에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국 정서에 딱 맞는 토속적인 음악을 찾고 있습니다.”
“국립국악원은 기존 음악을 가능하면 재사용하지 않고, 작품에 맞춰 창작을 합니다. 저희 국악원은 각 예술 장르에 맞는 국악 음악가를 발굴해서 지원하는 것이 정책이기도 합니다.”
내가 기대했던 답변이 아니었다. 살짝 당황스럽다. 내 표정이 굳어지자 담당자는 친절한 설명과 함께 다른 방법을 제안했다. 담당자는 한 층 위에 있는 국악 자료실로 안내했다. 그곳은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청각실이었다.
“혹시 ‘김영동’ 선생님 아세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이름은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는 내게 자리를 마련해 주고 카세트에 테이프를 밀어 넣었다. 딸깍, 툭—소리와 함께 김영동의 음악이 천천히 흘러나왔다. 국악인 김영동은 대금 연주자이자 작곡가로, 전통 국악과 창작 음악을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해 준다. 국립국악원의 담당자는 그의 음악 몇 곡을 추천해 주었다.
그중 하나의 제목은 “회상”이었다. 국악의 문외한인 나 같은 사람도 그 음악을 듣는 순간, 이건 분명히 ‘우리 땅의 소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회상’은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잔잔한 물결이 반복해서 밀려오는 느낌이기도 했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슬프면서도 따뜻했다. 무엇보다 그때 담당자의 친절하고 따뜻한 대응은 내 삶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돌이켜보면, 나 역시 때때로 아무런 이득도 없는데 오지랖을 부린 건 아마 그날의 경험 때문이었을 것이다.
연출을 맡은 S형에게 그 음악을 들려주었다.
“됐어.”
내겐 마치 만선을 알리는 외마디 함성처럼 들렸다. 국립국악원으로 향했던 길, 김영동이라는 이름을 통해, 나는 다시 음향이라는 언어로 연극에 녹아들고 있었다.
무대 역시 인상적이었다. 어부촌을 그대로 옮겨온 듯한 세트. 초가지붕, 투박한 나무 구조물, 바다 내음을 품은 무대 공간. 그것은 무대감독 M형의 솜씨였다. 그는 손재주 하나로 바다를 실내에 들여놓았다. 그렇게 『滿船』은 완성되어 갔다. 나는 비록 곰치가 되지 못했지만, 바다의 숨소리를 책임졌고, 관객은 그 소리를 들으며 무대를 떠나지 않았다.
“그물을 손에서 놓는 날에는 차라리 배를 가르고 말 것이여.”
곰치의 이 대사는 감정이 깊이 묻어났다. 말이 아니라, 폐부 깊숙이 스며든 무언가가 툭—하고 튀어나오는 느낌이었다.
후배는 그 대사를 읊조리듯 뱉으며 무대를 거침없이 휘저었고 관객을 압도하는 기세를 뿜어냈다. 그의 어눌한 사투리조차, 오히려 곰치의 절박함을 더욱 생생하게 살려냈다.
음향실 작은 스피커로 듣는 배우의 음성은 객석에서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 무대 뒤에서 바라보는 연극이 늘 그러하듯.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말이 아닌 소리, 표정이 아닌 울림이다. 객석을 감싸는 짧은 정적, 스피커 너머로 들려오는 배우들의 숨소리.
작은 숨결 하나에도 긴장의 떨림이 묻어 있었고, 조명 뒤에 떠도는 먼지와 무대 밖 어둠 속에서 스며 나오는 배우의 땀 냄새가 함께 어우러졌다.
그 순간, 문득 마음속에 하나의 문장이 떠올랐다.
“아, 나는 울림을 만들어내는 사람이구나.”
그렇게, 무대가 끝난 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내 자리에 의미가 생겼다.
연극은 언제나 익숙한 것을 새롭게 발견하는 여정이고, 나는 그 여정의 끝,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가장 오래 남아 있는 사람이다.
“조명이 꺼져도, 나는 여전히 무대에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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