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리어를 잘 만드는 사람
L교수가 학교에 부임한 건 15년 전이다.
학교에 부임하기 전 14년간 직장생활을 했다.
군미필인 그는 남들보다 3년이란 시간을 아껴 빠르게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중견 기업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3년의 경력을 채우자 조금 더 큰 회사의 홍보팀으로 이직에 성공했다. 모난 데가 없는 성격인 데다 말주변이 좋아 신뢰감이 있었고 남들이 신입으로 들어올 나이에 이미 3년 정도의 경력을 쌓았으니 회사 입장에서는 나쁠 게 없었다.
L이 두 번째 직장의 홍보팀에 있을 때 인터넷 벤처 붐이 일기 시작했다. L은 인터넷으로 세상이 많이 바뀔 거 같았다. 그렇다고 그는 인터넷 기업을 창업할 용기나 아이디어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시장의 흐름을 보는 눈이 있었다.
L은 이제 막 온라인 활동을 시작한 홍보 관련 커뮤니티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면서 자신도 조금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남들의 생각을 조금 발전시키고 거기에 자신의 아이디어를 얹으면 금세 새로운 글들이 나왔다. 깊이는 없었지만 다들 비슷했다.
온라인 활동이 이제 막 움트기 시작했고, 온라인에서 만난 사람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 교류를 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다들 비슷했다. 나이도, 생각도, 수준도.
L은 인터넷 시대에 어울리는 홍보라는 주제로 글을 모으기 시작했다. 자신의 아이디어와 남들의 생각, 온라인에서 찾은 여러 사례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조금씩 발전시키자 꽤 많은 분량이 되었다. L은 지인을 통해 작은 출판사를 소개받았고 책을 펴냈다. 많이 팔린 건 아니지만 시대 흐름에 맞는 주제인지라 관련 업계사람들은 좋아했다. 깊이 있는 내용은 아니었지만 그런 제안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트렌드를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는 것이니 인터넷 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이라면 관심을 가질만했다.
결국 L은 인터넷 기업으로 이직했다. 그의 책을 관심 깊게 본 한 인터넷 기업 대표가 이직을 제안했고, 그는 길지 않은 경력에도 불구하고 해당 기업의 홍보팀장이 되었다. 인터넷 벤처 붐이 불던 당시에는 'A기업, B기업과 제휴', 'A기업 신규 서비스 출시', 'A기업 ***이벤트 실시' 등 이런 내용만으로도 언론 기사가 나던 상황이라 언론 홍보가 그리 어렵진 않았다. 많은 투자를 받은 기업이었고, L에게 지원을 약속했던 터라 홍보팀 직원도 여럿이었기 때문에 L은 비교적 여유 있게 일을 쳐나갔다. L이 그때 가장 잘한 일은 대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것이었다.
인터넷 벤처 거품이 꺼지기 전 L이 다니던 회사도 엄청난 투자금을 쓰고 무너졌고, L도 다니던 회사를 나왔다. 그러나 L의 손에는 석사학위가 남았다. 무너진 회사와는 달리 L은 책, 책 출간 이후 가진 여러 강연, 그걸 배경으로 한 시대 흐름에 맞춘 업계로의 이직, 업무 환경을 활용한 학위 취득 등 순조롭게 쌓은 커리어를 바탕으로 규모는 작지만 탄탄한 회사로 이직했다. 대표와의 협의를 통해 박사과정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든 건 덤이었다. L이 회사에서 많은 걸 이루진 않았지만 책 출간과 수차례의 강연, 깊이는 부족하지만 딱히 틀린 말없는 표준적인 칼럼 등을 통해 회사에 보탬은 되었다. 그리고 반대급부로 L도 몇 년 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전부터 L의 모교방문은 잦아졌다. L이 졸업한 학교 동문 중 모교 출신으로 언론에 이렇게 많이 얼굴을 비친 사람은 없었다. 인터넷 시대에 맞게 이슈를 제기하면서 책을 펴내고, 강연도 다니고, 거기에 박사 학위까지 취득을 했으니 모교는 L을 반겼다. 마침 L의 모교 출신학과에는 모교 출신의 교수가 없었다. L은 회사를 그만두었고, 학교에 부임했다. 모든 게 딱 맞아떨어져 바로 전임강사부터 시작할 수 있었다. 정식 교원이 되니 외부와 할 수 있는 프로젝트는 더 많아지고 강연도 더 많아졌다.
학교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L이 다시 학교로 돌아와 교수가 될 거란 것은 L도, L의 주변 사람들도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14년의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시대 변화를 몸으로 겪었고, 그 과정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걸 작지만 하나씩 갖추다 보니 결국 남들이 부러워하는 교수직으로 옮길 수 있었다.
L이 회사 생활을 하는 동안 소소한 자료를 모으고 자기의 생각을 추가해 책을 내고, 좋은 조건으로 이직하며 대학원을 다니고, 다시 한발 더 나아가 박사 과정까지 하는 동안 주변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자기를 어필하고 기회를 잘 포착하는 L의 능력에 대해 질투하고 힐난했다. 남들이 묵묵히 자기 길을 걷는 동안 남의 아이디어와 자기의 아이디어를 묶어 예쁜 포장지로 포장해 스스로를 잘 팔기만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얘기를 또 다른 식으로 얘기하면 이렇게도 풀 수 있지 않을까?
L이 처음 학교를 졸업한 후 취업했을 때, 그리고 온라인 붐이 일기 시작할 때 관련 분야의 지식은 남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L은 업계 흐름에 빨리 눈을 뜨고 그 흐름에 눈을 맞춰 자기를 변화시킬 준비를 갖췄다. 그리고 환경을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 바꾼 후 본인의 캐리어를 탄탄하게 만들었다. 그가 커리어를 만들면서 만들었던 콘텐츠와 이곳저곳을 다니며 떠들었던 이야기들의 상당 부분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얘기하며 나누던 것들을 종합하고 발전시킨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몇이나 될까? 초기에 그와 함께 술집이나 세미나실에서 함께 떠들며 산업을 얘기하던 사람들이 그가 책을 냈을 때 그 책의 얇은 두께와 얕은 깊이를 비웃었지만, 그는 그걸 바탕으로 더 큰 자기만의 커리어를 쌓고 만들었다.
보통의 경우 하다가 결과가 잘 안 나오면 중간에 그만두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모습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는 말처럼 끊임없이 노력하다 보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결과를 만들 수 있는 게 아닐까? L이 처음부터 이런 결과를 목표로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한 발씩 디디며 소소한 결과를 하나씩 만들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오늘에 닿은 것을 보면 L은 참 대단한 사람이다.
나와 L과의 교제는 오래전에 끊겼다. 한때는 나도 가식적으로 느껴지는 그의 웃음과 대단한 내용이 없던 그의 책과 강의를 보고 들으며 비웃기도 했지만, 지나고 보니 그것 또한 보통의 노력으로는 만들 수 없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거기까지 가기에도 내공의 축적 없이는 힘든 것이라는 생각 또한 든다. 나는 오래전에 L을 잘못 본 적이 있지만, 지금은 L의 과거 행보와 현재의 결과가 그의 많은 노력 위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걸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