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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처 May 24. 2024

무작정 뛰고 보는 아이들

3학년 vs 6학년

아이들은 뛰는 걸 좋아한다. 기본적으로 논다는 것에 뛰어도 된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처럼 놀기로 작정하면 자꾸만 뛰려고 한다. 뭐가 그렇게 좋을까, 싶게끔 틈만 나면 뛰려고 한다. 어린아이들일수록 인기 많은 놀이도 술래잡기다. 심지어 교실에서 서로 모여 얘기하다가도 흥분하면 제자리에서라도 점프하는 게 아이들이다. 그만큼 아이들은 뛰고 싶어 한다.


학교에서는 이런 아이들이 다칠까 봐, 앞뒤 분간 없이 뛰어다니다가 큰 사고가 날까 봐 뛰는 걸 통제한다. 갖은 수단과 방법을 통해 뛰지 못하게 막고 때로 혼내기도 한다. 유일하게 그런 구속과 감시를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체육 시간이다. 오히려 빠르게 뛸 줄 알면 선생님과 친구들에게도 인정받으니 얼마나 신이 날까. 아이들도 서로 누가 빠르게 잘 뛰는지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다. 요즘은 서로의 공부 성적도 잘 말하지 않는데, 반에서 누가 빠르고 느린지 얘기하는 것엔 다들 거리낌이 없다. 


나는 수업 전 체육관의 화이트보드에 오늘 할 활동을 적어둔다. 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체육관에 들어서는데 3학년 아이들은 이미 이때부터 뛰려고 한다. 가져온 물통을 한편에 두기도 전에 그대로 체육관을 뛰어들어와 이내 화이트보드 앞에 당도한다. 그런 뒤 우와, 오늘 이거 한다!라고 소리치며 시작하는 게 다반사다. 이미 체육 시간인 것만으로 신이 나니 뛰어서 그걸 표현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다.


재밌는 것은 아이들의 뛰기와 기분의 상관관계는 역으로도 적용 가능하단 것이다. 게임 방법과 지켜야 할 규칙을 듣지 않고 장난을 치는 아이는 내게 꾸중을 듣는다. 그러면 그 아이는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죄송하단 표정을 짓는다. 더러는 말 잘 듣는 주변 아이들로부터 핀잔을 듣기도 한다. (어떨 때 보면 아이들은 선생님이 혼내는 것보다 주변 친구들이 뭐라고 하는 것을 더 듣기 싫어하는 것도 같다.) 그렇게 잠깐 풀이 죽었던 아이는 그랬던 것도 잠시, 술래잡기라도 한다 치면 전속력으로 도망 다니고 누군갈 쫓아다니면서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표정이 풀어져 있다. 많이 뛸수록 다 끝나고 나서 오늘 체육은 재밌었다며 교실로 돌아간다. 아이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건 충분히 뛰어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6학년을 데리고 수업하는 건 3학년과는 또 천지 차이다. 초등학교의 최고 학년인 6학년이 체육관에 들어설 때는 미친 듯이 뛰어들어오지 않는다.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몇몇 아이들 뒤로 자기들끼리 얘기 나누며 느릿느릿 들어서는 애늙은이들이 있다.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적당히 수업에 참여하는 듯싶다가도 조금만 힘들면 금방 빠져서 쉬려는 아이들도 있다. 최대한으로 뛰라고 해도 내키지 않으면 설렁설렁 뛰는 시늉만 내기도 한다. 수업 때 6학년을 뛰게 하려면 다각도의 설계가 필요하다. 게임으로 목표 의식을 심어주고 팀별 경쟁을 시키는 것도 열심히 뛰게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의욕이 앞선 아이들을 통제하는 것보다 자발적인 의욕을 이끌어내 운동시키는 게 더 어렵다.


문득 궁금해진다. 몸이 커지니 뛰는 게 힘에 부치는 걸까, 아니면 이제는 뛰지 않아도 충분히 즐거울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일까. 이 6학년 아이들도 3년 전에는 야생마처럼 체육관을 활보하는 그런 아이들이었을 텐데. 하긴 어른의 3년은 불과 어제일 같지만 아이들에겐 아득한 시간이다. 어린 고양이처럼 마냥 우다다 뛰어다니던 아이는 어느 문턱에서 자기 무게를 오롯이 발로 디디며 슬그머니 움직이는 완보동물이 되어버렸을까. 그래도 훌쩍 자란 몸에 비해 마음은 아직 애들이라는 걸 생각해야만 한다. 적어도 뛰어다니는 즐거움에 대한 기억은 풋풋하게 간직하고 있지 않겠는가. 나 또한 한때 아이였다는 사실은 이에 비할 수 없을 만큼 까마득한 기억이다. 


그러니 이제 막 여드름이 나고 몸은 성숙해져서 매사에 시큰둥한 아이들에게 내가 할 일은 몸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땀 흘리게 만드는 것이다. 어느새 더 자라 이때마저 아득해지는 순간은 올 것이다. 지금의 달리기가 마지막이진 않겠지만 아직은 더 충분히 뛰게 하고 싶다. 그래서 난 뛰고 나면 마치 좋은 일이라도 생길 것처럼 주문을 외듯 소리치곤 한다. 


얘들아, 더 뛰어야 돼, 뛰어야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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