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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처 Aug 10. 2024

나의 비보잉 경력(선생님이 사실은...)

올림픽과 비보잉, 2002년의 홍텐

  나는 중학교 때 비보잉을 접했다. 같은 반이 된 한 친구가 춤을 잘 추는 걸로 유명했고 으레 그렇듯 그 친구 옆에는 늘 자기도 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하거나 그 친구가 춤출 때 옆에서 신기하게 쳐다보는 무리가 있었다. 친구가 보여준 비보잉은 한마디로 신기했다. 당시 방송에서 흔히 나오던 가수의 안무 같은 게 아니었고, 물구나무서서 회전하거나 땅에 손을 짚고 몸통을 회전하는 식의 화려한 묘기에 가까웠다. 그게 브레이킹, 비보잉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고 실물로 비보잉을 접한 최초의 경험이었다.


  당시에는 아직 진로에 대한 고민도 없었고, 방과 후 학원 뺑뺑이를 돌아야 하는 환경도 아니었다. 학교가 전부였고 같은 반 친구인 인수와 함께 비보이였던 형섭에게 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이건 방과 후이건 틈틈이 연습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CA(동아리활동)도 명목상으로 댄스부를 만들었고 함께 비보잉만 했다.


  그때도 비보잉을 배우고 싶다는 애들은 많았는데 왜 제대로 한 건 우리밖에 없었을까. 비보잉은 운동의 개념으로 본다면 거의 기계 체조에 가깝고, 춤으로 얘기하자면 참 진도가 안 나가는 춤이다. 마루 운동에서 따 왔다는 기술 토마스의 경우 나는 익히는 데 1년 가까이 걸렸다. 중학교 2학년 내내 연습한 결과다. 어설프게 다리가 끌리는 한 바퀴가 아니라 제대로 허리를 띄워 한 바퀴를 도는 데에. 두 바퀴부터는 기술이라기보다 체력의 문제이고. 윈드밀은 3개월쯤 걸렸던 것 같다. 이렇다 보니 파워무브는 보는 건 신기한데 막상 배우려고 하면 얼마 안 가 다 떨어져 나간다. 나한테는 어렸을 때 그렇게 끈질기게 매달리며 익힌 경험이 지금 생각해 보니 너무 귀중한 경험이 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비보잉은 누구나 쉽게 배울 만한 스포츠나 춤은 아니라는 것이다.

파워무브 기술, '토마스'('플레어'라고도 함)

  우리는 그때 비보잉을 했다 정도의 경험이 아니라 정말 비보잉에 미쳐 있었고 기술을 갈고닦는 것만이 우리의 지상 과제였다. 늘 목말랐던 것은 연습실이었는데 우선 최소한으로 필요한 건 매끈한 바닥이었고, 그다음은 전면 대형 거울, 그리고 CD플레이어를 연결할 콘센트가 있어야 했다. 이 세 가지를 다 갖춘 곳은 학교에는 체육관 입구밖에 없었고, 어디든 두 가지만 충족해도 감지덕지였다. 학교를 마치고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연습하기도 했던 건 에폭시 재질의 매끈한 바닥이었기 때문이다. 때로는 친구 집으로 가서 같이 동영상을 보기도 하고 나름 진지한 토론도 나누고 기술에 대한 노하우를 공유했다. 학교 생활의 우선순위가 오로지 춤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비보이는 덕키였다. 그의 깔끔한 파워무브도 좋았지만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예술적인 감각이 춤에서 묻어 나오는 걸 그때도 어렴풋이 느꼈기 때문인 것 같다. 계속 파워무브를 파고들었던 형섭은 피플크루의 오성훈을 이전부터 좋아했었고, 친구 인수는 김효근(비보이 피직스)을 좋아해 스타일무브 뉴스쿨 쪽으로 파고들었다. 리버스와 익스프레션, 오보왕 정도가 우리가 그때 많이 보고 좋아했던 비보이팀이었다. 2002년은 한일 월드컵의 열기도 뜨거웠지만 우리에겐 독일의 세계대회 '배틀 오브 더 이어'에서 한국 대표팀 익스프레션이 우승한 해였다. 그 팀의 멤버에는 김홍열(홍텐)도 있었다.

전설이 된 2002년 'Battle of the year' 홍텐의 무브

  내가 살던 지방은 고등학교 비평준화 지역으로 졸업하면서 성적에 따라 자연히 학생들이 나뉘던 곳이었다. 그때부터는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적어도 그렇게 미쳐있었던 춤을 고등학교 가서는 어떻게 할지를 마음속으로 대략이나마 정해야 했다. 형섭은 실업계를 가면 나중에 취직은 어떻게 하지 않겠냐고 했고, 인수는 부모님을 설득해서라도 춤을 계속해볼 거라고 했다. 나는 춤에 미련만 갖은 채 아무런 결단도 내리지 못하고 성적에 맞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당시 중학교 졸업이 얼마 안 남았을 즈음 우리에게 파워무브를 알려줬던 두세 살 많던 고등학생 형이 이런 얘기를 했었다.


  "야, 나중 되면 비보잉이 올림픽 종목이 될 수도 있다더라."


  "예? 진짜요?"


  "어디서 들었는데 올림픽 종목 되면 국가대표로 뽑히고 그럼 군대도 안 갈 수 있고(군대 가면 더 이상 춤을 못 춘다는 생각, 이미 당시에도 나이가 들면 비보잉은 못할 거라는 인식이 있었다), 춤만으로 벌어먹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데."


  당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그걸 내가 믿었을까? 아니 거기 있던 우리 4명 중 누구라도 그걸 믿었을까? 확인할 길은 없지만 적어도 나는 올림픽 종목에 비보잉이 들어간다는 것 헛된 희망이라고 치부했다. 비보잉만 해서는 답이 없다는 잠정적 결론이 나와있으니 우리는 이런 빈약한 전망에라도 기대는 것 아닐까, 대충 그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가 학교를 졸업하듯이 이 즐거움과 열정에는 끝이 정해져 있을 거라고. 이건 춤일 뿐이라고. 난 지금 봐도 어린 나이에 너무 회의적이었고 현실에 부딪치는 것엔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난 어른이 되고 나서도 완전히 춤을 놓지는 못했다. 어린 시절 내가 무언가를 놓친 듯한 느낌 때문인지, 춤을 출 수 있는 데를 기웃거리기도 했고 남들한테 보여주기도 많이 했다. 교사로 신규 발령을 받고는 6학년 우리 반 학생에게 프리즈를 알려주기도 했었다.(지금 생각하면 많이 우습고, 이젠 절대 없을 일이지만.) 아직도 가끔은 오래 전의 내 모습을 꿈에서 보기도 한다.


  2022년 아시안게임에 비보잉이 정식 종목이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아니, 이미 수년 전에도 비보잉을 돈 받고 가르치는 학원이 있다는 사실과 방송에 여러 비보이 크루가 나오는 걸 보고 놀라긴 했었지만. 그리고 올해 2024 파리올림픽에 국가대표로 홍텐이 나온다는 소식에는 내 수많은 기억과 감정이 뒤엉켜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2002년 고등학생이었던 홍텐은 20여 년이 지나 마흔이 다 된 나이에 여전히 춤을 추고 있다. 당시 나와 같 꿈을 꾸고 지금도 그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홍텐은 살아 있는 레전드이다. 당시 부흥한 e-spots 계의 전설인 프로게이머 임요환도 은퇴한 지 한참이 지나 이제 롤의 페이커 시대인데 말이다. 한편으로 아쉬운 점은 지금 우리나라 비보잉 씬은 전성기를 살짝 벗어난 느낌이라는 거다. 무엇보다 새로운 세대가 지속적으로 유입되지 않은 탓이겠지.


  오늘 밤과 새벽에는 홍텐이 올림픽 무대에 선다고 한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앉아 홍텐의 경기를 볼 것이다. 메달을 목에 걸지 않아도 좋다. 이미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걸 충분히 보여줬던 사람이니까. 나는 올림픽 경기로 비보잉 배틀이 열리는 걸 내눈으로 확인하더라도 오래전 무얼 놓쳤는지 깨닫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다만 그때의 나를 떠올리고 싶어서라는 걸, 어디선가 계속 춤을 추고 있을 친구들을 떠올리기 위해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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