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가을 마라톤은 빚을 내서라도 해야 해!

by 느긋

'가을 골프는 빚을 내서라도 한다'는 말이 있다. 온대성 기후에서 열대성 기후로 변화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짧디 짧은 가을 날씨가 그만큼 귀하고 이를 누려야 한다는 골프인들의 재밌는 표현이다.


가을 마라톤도 빚을 내서라도 꼭 해봐야 하는 리스트 중의 하나가 되었다. 길고 긴 추석 연휴 막바지에 '2025 제4회 무등산권 지오마라톤 대회' 5.18km 부분을 참가하였다. 내 인생의 첫 번째 마라톤 참가로 매우 의미가 있었다. 지난 봄 친구들 단톡 방에서 우연히 마라톤 이야기가 나와 우리는 별생각 없이 신청을 했고 결국 모두 해내었다. 남들이 보기에 별거 아닐 수 있는 5km 남짓한 거리를 모두 무사히 완주하여 그 기쁨을 나눌 수 있었다.


신청당일,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로 5명 모두 도전하면 쉽게 신청이 될 줄 알았으나 우리 같은 사람이 많았던지 접속이 지연되어 신청을 하는데 애를 먹었다. R의 타짜 수준의 재빠른 손놀림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고 우리 모두는 생애 첫 마라톤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라톤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는 R의 지인으로부터 러닝 자세도 교정받고 동적, 정적 스트레칭도 배웠다. 자주 모이지는 못했지만 한 번씩 모여 5km를 뛰기도 했고 각자 집 근처에서 나름대로 러닝을 하며 천천히 준비하였다. 러닝화와 러닝벨트, 무릎 보호대까지 준비하여 대한민국의 러닝 열풍에 우리도 조금씩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대회 며칠 전, 친구 R이 단체복을 준비한다고 하여 분홍색으로 맞추었다. 마라톤 신청에 단체복 선물까지 너무 고마웠다. 대회 전날 단톡방에는 코스와 시간이 부지런한 누군가로부터 안내되었고 마침내 대회 당일이 되었다.


아침 7시까지 집결이었다. 집에서 차로 50분 정도 걸려 새벽 일찍 일어나 밥도 먹지 못하고 출발하였다. 안개가 자욱한 꼬불꼬불한 산길을 지나며 대회 장소로 가 진행요원들의 안내를 받았다. 많이 늦지 않게 도착했으나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몸을 풀고 있었다. 아침이라 제법 쌀쌀하였는데 마라톤 동호회인들은 추위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처음으로 마라톤에 도전하는 느낌을 풀풀 풍기는 우리도 모여 몸이 풀기 시작하였다.

대회장은 대회보다 축제느낌이 있어 좋았다. 마라톤 동호회에서 나온 사람들은 복장부터가 딱 보기에도 전문적인 러너 같았고 가족단위 참가자들도 보기가 좋았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13개월짜리 아기부터 흰머리가 멋진 건강한 어르신들도 많았다. 우리같이 팀복을 맞춰 입고 온 친구, 지인들 참가자도 있었고 저마다 얼굴에는 긴장보다 웃음꽃이 피어있었다. 나이를 떠나 이 시간에 마라톤에 참가한다는 자체가 건강하고 활기찬 삶을 보여주는 것 같아 나도 잘 살아가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사진을 찍어주는 곳도 있고 지역 특산품을 판매하는 곳도 매우 재밌어 보였다. 한쪽에서는 지역 방송국에서 나와 마라토너들을 인터뷰하고 유튜브 중계도 하였다. 사회자의 말을 들어보니 이번 마라톤에 1500명이 참석하였고 인기가 많아 신청하는데 많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 마라톤에 우리도 참가했다는 사실이 행운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운동복이 아닌 캐릭터와 같은 재밌는 복장을 하고 뛰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유쾌해 보여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단체로 몸을 풀고 코스별로 출발하기 시작하였다. 우리가 참가한 5.18km는 제일 나중에 출발하여 기다리는데 좀 지루할 뻔했지만 우리끼리 사진도 많이 찍으며 수다를 떠니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이렇게 아침 일찍 일어나 뛰는 건 처음이라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같은 것을 바라보며 뛴다는 사실 자체에 심장이 두근댔다.


3! 2! 1!

드디어 출발이다. 5.18km는 기록이 공식적으로 측정이 되지 않아 자체적으로 기록을 재기 위해 스마트워치를 켰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와 함께 우리 5명은 우르르 앞으로 몰려 나갔다. 처음에 같은 위치에서 뛰기 시작하였으나 자신의 속도에 맞게 개인적으로 뛰었다. 이번 대회 나의 목표는 40분 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안개를 뚫고 운전을 하고 오는 내내 체력이 소비되었지만 느리더라도 중간에 걷지 않고 완주하고 싶었다.


'무등산권 지오마라톤 대회'라는 이름답게 아름다운 무등산을 끼고 마라톤을 하였다. 초반에는 한꺼번에 몰려 가느라 주변 경치를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저마다의 속도에 따라 점차 분산되며 가을 풍경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도로가에 뱀이 있어 놀라기도 하였다. 멀리서 봤을 때는 큰 지렁이인 줄 알았으나 가까이 가서 보니 많은 사람들에 놀란 뱀이 있어 움츠리고 있어 사람들이 밟지 않도록 '뱀!'이라고 외치기도 하였다. 정말 자연 그 자체이다.


한참을 뛰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겨우 1km 표지판이 보였다. 역시 잠을 충분히 자야 러닝할 때 컨디션도 좋은 법이다. 음악을 듣지 않고 그냥 러닝 하는 것을 좋아해 이번에도 아무것도 듣지 않으며 묵묵히 천천히 달려 나갔다. 주변에서 격려하며 말하는 소리, 새소리, 중계하는 오토바이 소리 등을 들으며 달리니 지루하지는 않았지만 평소보다 힘은 들었다. 친구 3명은 벌써 반환점을 돌아와 저 멀리서 보였다. 웃으며 하이파이브를 하니 좀 힘이 났다.


드디어 나에게도 반환점이 보이고 돌기 바로 직전에 급수대가 보였다. 목은 그리 마르지 않았지만 마라토너들이 하는 것처럼 물을 낚아채 한 모금 마시고 싶었다. 속도를 조금씩 줄여 종이컵을 드니 물이 가득 있어 살짝 놀랐지만 시원해서 참 좋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의 속도대로 가며 중간에 걷거나 쉬지 않겠다는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며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발을 옮겼다.


이 날은 그야말로 완벽하고 깨끗한 가을 날씨였다. 해는 강했지만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 한줄기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옆에는 황금들녘이 넘실댔고 가을 하늘은 눈이 부실 정도로 푸르렀다. 평소 러닝을 할 때는 동네 운동장에서만 했는데 도로를 끼고 달리니 정말 특별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조금씩 꾸준히 가니 도착점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막판에 더 힘을 내어 드디어 골인! 미리 도착해 있던 친구 3명이 나를 반겨주었다. 시원한 물은 그 순간 어떤 것보다 맛있었다. 나의 기록은 목표했던 대로 40분 이내였다. 중간에 걸을까 말까 하는 유혹이 있었지만 쉬지 않고 계속 뛴 나 자신이 너무 기특했다. 마지막 친구까지 무사히 완주를 하고 완주메달과 기념품을 받았다. 메달을 받으니 뿌듯한 기분이 더 올라왔고 작지만 해냈다는 성취감이 나를 힘나게 했다. 기념품은 샌드위치, 쌀, 포도즙, 약과였다. 참가비 15000원만 내고 이렇게 좋은 경험과 선물을 가질 수 있어 너무 좋았다.



바닥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물건을 찾은 후 우리 모두 근처에 있는 온천으로 씻으러 갔다. 마라톤 참가자들은 무려 50% 할인을 받을 수 있어 더 기분이 좋았다. 온천 사장님과 짤막한 농담을 주고받은 후 시원하게 온천을 했다. 온천을 끝낸 후 허기가 미친 듯이 몰려와 샤부샤부집으로 발걸음을 옮겨 건강한 점심을 먹었다. 나의 최애 음식은 샤부샤부이다. 그냥 먹어도 맛있는데 오늘은 마라톤까지 하고 와서 다른 때보다 더욱 맛이 좋았다. 이런 게 행복이지! 나중에 우리 가족들과 5km에 도전하고 싶은데 우리 집 남자들이 내 말을 따라 줄려나 모르겠다.


신청부터 마라톤까지 몇 개월의 여정이 끝났다. 대회에 직접 나가보니 마라톤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다. 혼자서 하는 러닝도 좋지만 다 함께 특별한 공간에서 뛰고 무엇보다 메달과 기념품을 받아서 더욱 좋았다. 자신의 속도에 맞게 무리하지 않고 꾸준하게 뛴다면 부상 위험도 줄고 즐겁게 오랫동안 참여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을이 소중한 이유는 짧아서 더 그러겠지! 푸른 하늘과 맑은 공기, 황금빛 들녘이 사람들의 영혼을 채워주고 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관장님, 저는 그냥 2인자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