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긋 Jun 25. 2024

막걸리는 70대 엄마, 아빠를 춤추게 한다.

 지난주 토요일 선생님들과 전북특별자치도 순창으로 '전북교육여행'을 다녀왔다. 발효의 고장답게 순창발효테마파크라는 곳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남편과의 연애 초기시절 2000년대 초반, 그러니까 20년도 훨씬 전에 순창 고추장마을에 가서 고추장 장독대만 잔뜩 보고 왔던 기억이 있는데 그 사이 순창이 이렇게 발전할 줄이야 정말 상상도 못했다. 하긴 강산도 2번 바뀌고도 몇 년이 남으니 당연한 걸지도 모르겠다. 순창의 또 하나의 명물인 강천산군립공원은 아이가 어릴 때 치킨과 수박을 싸들고 몇 번 와봤는데 가까이에 있는 순창발효테마파크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완전 신세계였다.


 놀이시설 및 야외 힐링파크도 좋았고, 다양한 전시 시설의 하나인 센스 있는 네이밍의 '효모사피엔스'관도 많은 기억에 남는다. 무엇보다 체험교육프로그램인 막걸리 만들기가 제일 재미있었다. 찹쌀 고두밥과 누룩을 넣고 거기에 물을 섞은 후, 팔이 빠져라 주물 주물하기만 하면 끝이다. 평소 막걸리를 엄청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직접 막걸리를 만들어보는 게 평생소원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만들 수 있어서 너무나 행복했다. 여름이라 발효가 잘 되어 며칠만 지나면 먹을 수 있다는 사실에 더 행복해졌다. 행복이 별거냐, 이게 바로 행복이지. 나이가 들면서 가장 좋은 것 중에 하나는 매사에 감사를 느낀다는 점이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좋은 점은 일상에서 행복을 발견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결코 가볍지 않은 막걸리 통을 집까지 안전하게 모시고 와 주방 한구석에 잘 놓아두었다. 하루 사이에 벌써 많이 부푼 것 같다. 다음 날 귀를 가까이 대보니 팡팡, 보글보글 같은 귀여운 소리도 제법 크게 난다. 맛있게 익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혹여 불청객인 초파리가 막걸리를 해치지 않도록 비닐봉지를 씌워 아주 작은 구멍 5개를 뚫어 놓았다. 덧붙여, 잘 익어라! 하고 응원하는 말도 해준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막걸리에 점점 물이 많아지는 것을 보며 드디어 채주(막걸리 거르기) 할 때가 온 것임을 직감적으로 깨닫고 가까이에 사시는 엄마에게 확인을 받는다. 마침 엄마집에는 막걸리 안주로 맛있게 잘 익은 열무김치가 있었고, 평소 엄마가 식혜를 만드실 때 사용하시는 삼베 주머니에 쌀알이 동동 떠있는 막걸리를 부었다. 감동의 물결이 몰려오는 순간이다. 생각보다 많은 양의 막걸리가 나왔고 색도 너무나 이뻤다. 그러나 맛을 보는 순간 시큼한 맛이 강해 살짝 실망을 하던 차에 노련하신 엄마가 막걸리에 물과 흑설탕을 타신다. 농도와 간을 맞추니 술이 너무나 맛있다. 생각보다 채주를 늦게 한 탓에 시큼함도 있었지만 그래도 처음치곤 나름대로 성공적이다. 아빠, 엄마와 함께 막걸리를 간단하게 한잔씩 하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평소 한시를 좋아하시고 고사성어의 유래도 많이 아시는 아빠의 입담이 막걸리가 들어가니 더 재미있어진다. 오늘도 역시 술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풀어주신다.


맹구주산(猛狗酒酸) - 술집에 사나운 개가 있으면 술이 쉰다


 술을 파는 송나라 사람이 있었는데 술맛이 좋고, 주인장 인심도 좋았으나 잘 팔리지 않아 술이 쉬는 것이다. 알고 보니 그 술집에는 사나운 개가 있었고, 사람들이 개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그 술집에 잘 못들어가 술이 안 팔리니 쉬어버린다는 내용의 사자성어였다. 군주의 정치에 관한 어려운 이야기로 연결되었으나 나는 막걸리를 좀 더 빨리 채주를 했어야 한다는 결론을 낸다. 이에 반해 엄마는 '막걸릿집 주인은 손이 곱고, 떡집 주인은 손이 거칠다'라는 이야기로 채주를 한 후에 나온 찌꺼기를 가지고 손이나 얼굴을 마사지할 계획을 말씀해 주신다. 막걸리 하나에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니 정말 재밌었다.



 보기보다 알코올 도수가 약하지 않았던지 한잔씩 하신 엄마, 아빠의 볼이 발그레해짐을 느끼고 기분이 좋아지심이 실시간으로 보인다. 흥에 취한 엄마가 갑자기 젓가락을 드시더니 장단을 치며 노래를 구수하게 부르신다. 아빠도 아시는 노래인지 옆에서 흥얼거리신다. '주안상 하나 놓고 마주 앉은 사람아, 술이나 따르면서 설움 설움을 엮어나 보자'라는 가사의 노래는 '충청도 아줌마(1966)'이다. 시가 따로 없다. 술을 먹으며 서로의 설움과 아픔을 엮어보잰다. 작사가의 인생에 대한 그 무언가가 녹아있는 가사에 감탄을 감출 수 없다. 엄마의 노래가 끝나고 나니 이번에는 아빠가 유튜브에서 같은 노래를 트신다. 막내딸이 직접 담근 술을 드셔서 기분이 좋아지신 걸까? 엄마와 아빠가 갑자기 손을 잡고 춤을 추신다. 노래를 부르며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춤을 추시는 모습을 보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고 또 감사함을 느낀다. 이렇게 소중한 장면을 놓치지 않기 위해 나는 동영상을 찍고 두고두고 볼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엄마의 젓가락 장단이 예사롭지 않다.
음악을 틀고 본격적으로 춤을 추고 계시는 우리 엄마, 아빠


 막내딸의 나이가 40대 중반을 향해 가고 있는 노부부의 이런 소소하고 행복한 모습이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함을 느끼는 요즘이다. 조금이나마 철이 든 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을 하다가 먹먹해진 글 하나를 본 이후 부모님의 영상을 되도록 많이 찍기 위해 노력한다. 부모님이 언제까지 내 곁에 계셔줄지 모르니 평소에 사진보다 동영상을 많이 찍어두라는 글이었다. 이 나이에도 양가 부모님 모두 든든하게 계셔주셔서 얼마나 감사한 줄 모른다. 진짜 조금 철이 들었나 보다.

 

 지난 3월에는 부모님의 금혼식이 있었다. 함께 한 50년의 세월 동안 어디 좋은 일만 있었으랴. 두 분이 서로 의지하며 묵묵히 50년의 세월을 함께 하심에 존경과 사랑의 박수를 보낸다. 어둠이 있으니 빛이 있는 것처럼 두 분의 인생에서 힘든 과정을 함께 극복하셨으니 오늘날처럼 막걸리 한잔 걸치고 춤을 출 수 있는 날이 온 것이라 본다. 해가 다르게 약해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며 많은 추억을 쌓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마음과 다르게 현실에 치일 때가 많다. 가까이 살아도 생각보다 얼굴 보는 게 어렵고, 나를 자주 보고 싶어 하시는 마음을 외면한 적도 많다. 오늘 두 분이 춤추시는 모습을 보고 반성한다. 거창하지는 않더라도 오늘 같이 소소한 행복을 자주 찾아봐야겠다.


잘 익어가는 막걸리처럼 두 분의 인생도 잘 익어가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도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