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홍HONG Jun 15. 2024

생각이란 도구의 쓸모

베스트셀러 작가에 대한 혹평과 그 작가의 <좋아요>




그때처럼 2016~ 2019년까지의 기록들을 정리하다가 우연한 기록을 발견했다.

어떤 베스트셀러 작가의 책에 대해 인스타 피드로 혹평을 했는데 그 작가가 어떻게 알고 내 인스타 그 글에 <좋아요>를 눌렀다는... 그와 관련된 일화를 기록한 글이었다.


삶의 비중이 항상 그렇지만, 우선순위로 인해 어딘가에 쏠려있기에 자투리의 짧은 단상들은 기억조차 못할 때가 많다. 마침 일기라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어서 이런 일도 있었구나~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읽었다.


그때의 기록을 짐작해 보니,

그때의 나는, 도저히 그 작가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이해가 안되었던 것 같다. 무슨 감성에세이 라는데 좋은 얘기만 죄다 써놓은 무색무취무미였다. 지금이야 머 독립출판으로라도 작가가 된다지만, 나는 그 '작가'라는 직업군의 사람들을 존경에 가깝게 경외하기 때문에 출판사에서 아이돌처럼 키워진 것 같은? 아무튼 그 작가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그 작가가 자신의 책을 혹평한 나의 인스타를 찾아와 <좋아요>를 누를 정도면, 비록 책은 내 취향이 아니지만 그 작가의 인품은 괜찮은 사람 혹은 반대를 품을 수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다운 인성이라고 그렇게 기록되어 있었다. (참고로 나는 그 작가의 책을 중고서점에서라도 산 적이 없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좀 다르다


그 출간의 힘듦을 아는 지금에도 그 작가의 작품을 내 돈 주고 사서 읽을 리도 없지만, 읽는 것도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더우기 베스트셀러 정도의 작가가 된 그 사람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절대로 그의 작품에 호의적이지 않는 사람이 자신의 책을 돈을 주고 산다는 것(구매행위)과 그의 팬(내면적 연결고리)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그럼에도 누른 <좋아요>가 무슨 의미겠는가? 설마 내가 그 <좋아요>를 누른 작가의 인품에 감동하여 행동의 변화를 할 것 같아서? 베스트셀러작가가 그런 생각으로 눌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가끔 <좋아요> 버튼을
정말 <좋아요>의 감정으로 착각  


왜냐면 그렇게 느끼도록 감정까지 훈련되고 아이콘화 되어 있다. 실제 마음은 그 누구도 모르기 때문이며 그것 역시 도구로서의 역할에 그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웃으며 욕하는 방법을 터득하는 고도의 표현기술처럼.

정말 '좋아요'가 순도 100%의 좋아요 인지 비아냥을 섞은 좋아요 60% 인지.

결국 제멋대로 해석한다는 추론이 더 적합하다.


그 작가가 내게 '꺼져라' '엿 먹어라'라는 마음으로 <좋아요>를 눌렀을지는 아무도 모르며, 그냥 행위의 다름 아니기 때문에 그 진심의 진위(의미)도 사실은,,,중요하지 않다. 왜냐면 행동을 변화시킬 수 없기에.

정작 자신에게 시간을 쏟지 못하고 남의 일에 기웃거리며 에너지를 소모하는 그 '평범함'의 범주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당신의 출간 책을 힐난한
 사람의 글에 <좋아요>를 눌러줄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그건 나도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나서
생각해 보겠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가장 솔직한 우문현답 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위와 위치로 인해 없던 품위도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만수르처럼 그 많은 돈이 있다면 맨시티 경기장은 못 짓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앞당겨 고민하는 것이 얼마나 무용한 에너지 소모인가? 마치 복권 당첨되면 반띵 할래? 말래?로 싸우던 부부가 한쪽의 인색함(마음씀씀이)에 빈정 상하여 평생을 함께할 수 없다며 이혼을 생각하는 것과 머가 다른가 말이다. 그럼에도 내 글에서 조차 그 00 작가의 출간 책을 언급하지 않겠다.


내 지면의 값이 얼마 짜린데.
겸상 안되지~. ㅋㅋ





숟가락의 쓸모


숟가락은 밥을 먹을 때 쓰는 도구가 일반적으로 그렇다.

특수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그 숟가락은 그 숟가락이 아닐 수도 있다. 특히 영화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하는 곳(특수한 장소)에선 숟가락은 무기도 되고, 탈옥을 돕는 변신된 삽이 될 수도 있다. 다음세상으로의 포문을 도와주는 절박한 몸짓의 상징, 종국에 정말 지하세계를 이룩하게 된다면 문명의 탄생을 도운 신물神物로 추앙될 '숟가락'일 것이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기 위한 입국심사에서 '가위'가 반입이 안될 수도 있다는 것은 단순히 그것이 '가위'라는 도구로 존재되고 규정될 수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나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숟가락은 밥 먹는 용도가 아니며, 단지 요리에 설탕을 개량하는 용도로 쓸 것으로 규정을 했음에도 사람들은 그 숟가락을 밥 먹는데 쓰지 않으니까 교양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그 숟가락을 밥 먹는데만 써본 지극히 협소한 경험의 부재가 생각의 틀로 굳어진 한계라고 본다.

 

우리는
상대의 무례함을 마주하는 불편보다
바뀌지 않는 고정된 시각을 만날 때
더한 불쾌를 경험한다.


나는, 일상에서 무례함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사고의 벽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 때다. 직장생활에서 그런 동료 또는 상사를 만나면 정말.... 머릿속이 하얗게 된다.

보통 그것은 '평범함'이라는 탈을 쓰고 등장하여 미화되곤 한다. 동네 아저씨 같은 수더분한 얼굴로.


유연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장벽.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의 여지 혹은 여유조차 없는 사람들을 만날 때 가끔 내가 2020년대에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의아스러울 때가 있었다.

특히 창의성을 발휘하여 다양한 캐릭터를 양산하고 그 재미를 온 세상의 수혜로 발산하라고 만든 플랫폼에서 조차. 일상의 잣대로 그 범주를 협소화 시키고 있는 것 같다.

스마트폰을 들고만 있지 스마트하게 사는 방법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평범한 민낯으로. 자신이 갖고 있는 도구의 쓸모에 대해선 무지성에 가깝고, 남이 무슨 도구를 들고 있는지에만 끊임없이 비교하고 염탐하는 사회 분위기랄까...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단순히 글을 읽고 쓰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깝다는 한계점을 찍는다.


그런데 머 어쩌겠는가. 사회 대다수가 그렇게 된 이유와 현상이 있을 테니 그것조차 납득이 안 되는 건 아니다. 다만, 더 힘들어진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밤하늘의 별을 보는 게...  








All txt by_HONG

photo by_HONG (볼로냐일러스트 전시회에서)


22018년 8월 11일의 기록을 보며

2024. 6.15 첨언하며...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시골아이 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