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문학, 그리고 교양
나는 오늘날 ‘소피’와 함께 ‘교양’을 세트로 안내한다. “φιλοσοφία” 아래에 “Bildung”을 쓴 뒤 “‘Building’과 닮아있다”고 운을 띄운다.
“문자 그대로 무언가를 지어 올린다는 뜻입니다. 한 인간의 영역 안에서 짓는 것이 되겠지요. 가령 한 인간의 ‘내면’에서 지어 올릴 수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나는 이 질문에 답하는 대신 세 권째의 낭만 이야기를 하겠다.
고교 생활이 아직 서투르던 어느 봄날 아침, 나는 공식 외출증을 받아서 모교인 대구중학교로 향했다. 명문고에 입학한 자랑스러운 대표 선배로서 학교를 홍보하러 나선 것이다. 그곳 교장으로 부임하신 전임 교감 선생님께 반드시 인사를 올리라는 교무 부장 선생님의 엄명을 받아 든 특사 신분이었다.
교장 선생님께선 만면에 미소를 띠시며 앳된 나를 귀빈처럼 맞아주셨다. 낡은 코트 차림으로 어리벙벙하게 허리를 숙이던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선생님이 내미신 손을 받아 들었다. 아직 쌀쌀하던 미8군 부대 앞의 공기 속에서 교장 선생님이 부드럽게 감싸 오신 손은 유난히 따뜻하고 상냥하였다.
“내가 이걸 한 권 주마. 이게 네게 필요할 거야.”
선생님께서 친절하게 건네주신 것은 『소피의 세계』와 『교양』을 붙여놓은 것보다도 더 두꺼운 대구중학교 총동창회원 명부였다. 통상 십 년 전후의 간격으로 공들여 제작하는 데다 비싼 회비를 지급한 정회원에게만 배부하는 이 책을 선생님께서는 사비로 구입하여 내게 선물해 주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창립 공신으로서 대구외고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아직 채 싹조차 틔우지 못한 어린 제자를 깊이 아끼시는 마음으로 그 같은 선물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아직 사회에 진출도 하지 못한 풋내기가 그 책을 ‘용도대로’ 활용할 수 있었을 리 만무하다. 사전만큼이나 두꺼운 그 동창회원 명부는 한동안 우리 가문의 족보 옆에 보물처럼 꽂혀만 있었다. 나는 한 번씩 그 거대한 책을 내려서 먼지를 털어내고 사회 각층의 요직에 진출하신 선배님들의 이름을 찬찬히 훑어보는 것으로 교장 선생님의 안부를 대신 여쭙곤 했다.
나이 사십이 다 되어 이곳저곳으로부터 제법 선생 소리를 듣게 된 지금에 와서야 그 책에 빼곡히 나열된 번호를 한 번 눌러 볼까 싶은 마음도 다소간 일게 되었지만, 내가 알아볼 만한 분들의 대부분은 이미 별세하신 지 오래다. 이 책이야말로 낡아서 수명을 다한 셈이다. 그러나 내가 한 번씩 이 책을 펼쳐보며 큰 꿈을 품었다는 것만으로도 그만의 소임은 충분히 다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철학’을 전공하여 ‘교양’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그것은 나조차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어쩌면 그렇게, 한 시대의 낭만이 저물어 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 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문학창작산실(수필) 선정작. 이 글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인 문장웹진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