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문학, 그리고 교양
『소피의 세계(Sophies Verden)』는 내가 까마득히 어렸던 시절에 나온 책인데 여전히 잘 팔린다. 애당초에 분책(分冊)으로 출간되었던 이 정체불명의 소설은 그간 합본이 되고 양장을 입는가 싶더니 몇 차례나 개정을 거듭하면서 어느새 스물여섯 살이 되었다. 스물여섯 살은 내가 철학을 공부하기로 마지막 결심을 굳혔던 나이다. 우여곡절 끝에 내가 그럭저럭 연구자 시늉을 할 수 있게끔 될 그동안에, 철학의 길로 진즉에 나를 등 떠밀었던 이 책은 그렇게 속절없이 나이를 먹어버리고 말았다.
주인공의 이름인 소피(Sophie)는 ‘지혜’를 뜻하는 그리스어다. 활자화된 소피와 데면데면해진 지도 십 년이 다 되어 가는데, 아직도 소피 이야기로 문을 열지 않으면 강의가 영 개운치 않다. 첫 수업이 열리면 나는 뚜벅뚜벅 강단을 가로질러 걸어가서 칠판에 “φιλοσοφία”라고 크게 휘갈긴다. 출석도 부르지 않은 학생들은 영문을 몰라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나는 “philo-sophia”라고 조그맣게 부기한다. 통상 “지혜(를) 사랑(하기)”로 풀이되고, 곧 철학(哲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때의 그리스 문자는 구태여 써놓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짐짓 엄숙한 표정으로 그 미지의 글자를 그려낸다. 그렇게 하는 편이 순진한 학생들의 눈에 훨씬 그럴싸하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부러 몸에 끼는 재킷을 차려입고 외출하는 짓과 비근하다고나 할까.
요슈타인 가아더(Jostein Gaarder)라는 생경한 이름의 노르웨이 윤리 교사는 본래 어린 딸에게 읽어줄 목적으로 이 글을 썼다고 한다. 이것이 뜻밖에도 공전의 히트를 치는 바람에 가아더는 지루한 교사 생활을 때려치웠고, 번역본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은 모라 불리는 제3국 윤리 교사의 손에 들어왔다. 은 선생님의 수업을 듣던 내가 『소피의 세계』와 만나게 된 배경을 굳이 말해 보자면 그런 식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내게 ‘수업’이란 ‘잠을 자는’과 동의어처럼 되어 있었는데, 어렵사리 명문고로 진학한 뒤에도 이 못된 습관은 도대체 개선될 조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수업 내용이 정말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가슴과 불경(佛經)에 손을 얹고서, 맹세코 주장할 수 있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은 선생님이 당신의 대머리를 희생양 삼아 던지시던 안온한 농담 몇 마디, 그리고 선생님께서 때때로 추천해 주시던 몇 권의 철학 입문서다.
험난하기 짝없는 요즘 출판시장에서 『소피의 세계』는 『철학의 근본문제에 관한 10가지 성찰』(이 책은 이후 『철학의 주요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개제(改題)되었다)과 함께 끈덕진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는 그만큼 일찍부터 은 선생님의 안목이 탁월하셨음을 방증해 주는 것이다. 본래 이들 책이 소개되었던 것은 선생님이 기획하셨던 1학년 대상의 서양 사상사 특강에서였고, 그것은 여름 방학의 수업이었으며, 당연한 말로서 8월 언저리의 여름밤에 『수학의 정석』을 들여다볼 의지 따위는 생길 턱이 없으므로, 나는 이 책 두 권을 정말이지 씹어 삼키듯 독파했다.
인제 와서야 생각해 보면, 그것은 고상하고 우아한 윤리 선생님에 대한 어떤 ‘팬심’의 발로였던 것이다.
※ 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문학창작산실(수필) 선정작. 이 글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인 문장웹진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