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력표〉에 따르면 아버지는 69년 12월(22세)에 하사로 임관하여 72년 8월(25세)에 중사로 진급한 뒤 79년 1월(31세)에 이르기까지 8호봉으로 차근차근 승급되었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 없이 79년 5월(32세)에 돌연 전역하였다. 이것은 정말 ‘돌연’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행동이었다.
그 동안 아버지는 군에서 사소한 문제조차 일으킨 기록이 없었다. 문제는커녕 전장에서의 공적으로 71년과 73년에 각각 무공포장과 종군기장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전쟁의 시대였다고는 하나, 아무나 불쑥 월남으로 날아가서 공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적지에서 낡은 M16 몇 번 쏘아봤다고, 대한민국은 누구에게도 그런 식으로 훈장을 주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이유였든 무엇이었든 간에, 그 사이에 공식적인 텍스트로 기록할 수 없는 어떤 일신상의 사유가 있었으리라고 추론하는 것이 분명 합리적이다. 그러나 물론 나로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자료는 아주 제한적으로만 구할 수 있다. 그것도 구전이 아닌 이런 식의 공식 문서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아버지에게 물어보면 간단하지 않으냐고? 당연히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아버지는 절대로 자기 삶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간간이, 아버지가 과거의 에피소드를 풀어놓는 경우가 있다. 대체로는 반복되는 레퍼토리지만 아주 가끔 새로운 이야기가 튀어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기억의 편린일 뿐 다른 정보와는 좀처럼 연결되지 않는다.
어쩌다 그런 정보가 나올라치면, 아버지는 마치 실수라도 했다는 듯 그 즉시 입을 굳게 다물어 버리는 것이다. 입술이 두꺼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 자물쇠가 한없이 단단하게 느껴진다.
1987년, 아버지는 수성구 경계의 골목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미 스멀스멀 젠트리피케이션이 시작되고 있던 낡은 주택가였다. 이착륙 소음이 일상인 대구공항 앞의 아파트와 경북대 인근의 빌라촌을 거쳐 대구에서의 세 번째 정착지였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 이동은 아니었다. 올라가는 전세금 정도가 이유였을까. 언제나 그렇듯 떠밀리고 흩날린 끝에 간신히, 라는 느낌으로 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이삿짐을 날랐던 인부들이 마른오징어를 마요네즈에 찍어 먹던 것이 기억난다. 나는 그때 세 살이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이십 년 조금 넘게 살았다. 이후 좁은 골목길이 도로로 확장되면서 그 집의 대들보가 시에 수용되었고, 안 그래도 헐어빠졌던 한옥은 불도저에 떠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에는 김광석 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가장자리든 뭐든 간에 그래도 소속이 수성구였다면 사는 꼴이 조금은 달랐을까. 나는 대구의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과 한 반에 편성되었다. 그 골목의 아이들이 다 그런 식이었다. 그래도 철없던 나는 부잣집 아이들과 어울려 잘 놀았다. ‘그래도’라는 것은,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버지는 통근 버스를 타고 공장으로 출근했다. 신천대로가 막 시작되는 지점에서 봉고차를 얻어 타면 3공단까지 한 시간이 걸렸다. 사설 통근 버스란 언제 도착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는 늘 새벽 일찍 대로변에 서서 우두커니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렇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곳의 삶이란 무어가 되었든 운 좋게 주어지기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내가 스스로의 ‘통근’에 대하여 반추해 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라 할 수 있겠다.
※ 2024 아르코문학창작기금 문학창작산실(수필) 선정작. 이 글은 대한민국 공식 전자정부 누리집인 문장웹진에서도 읽으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