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T가 활성화되지 않은 이때 공중파라는 것은 꿈의 직장과 같은 것이었다. 일반 회사원들이 흔히 말하는 삼성, LG 등등 이런 대기업 같은 곳이었다. 물론 일반 직장인들과는 다르게 작가들은 프로그램에 따라서 또다시 다른 방송국으로 옮기게 되겠지만 공중파와 케이블은 엄연히 달랐다.
공중파에서 일을 하는 작가들은 다른 프로그램을 가더라도 또 다른 공중파 채널로 옮기면서 3사(MBC, KBS, SBS)에서만 돌게 되고 케이블 채널에서 일을 하는 작가들은 계속해서 다른 케이블 채널들로만 옮겨 다니게 되는 것이다. 일단 시작하면 그 안에서만 돌게 되지만 이미 자기들끼리 프로그램을 옮겨 다니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그 시작이라는 것을 차지하기가 무지 어려웠다.
게다가 외주 제작사에서만 일해왔던 나는 KBS 본사에서 제작하는 프로그램을 하게 되었으니 체계적인 시스템과 월급을 못 받고 쫓겨나는 일에 대한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에 너무나 행복했고 또한 이미 유명한 장수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에 당분간 돈에 대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안도감이 컸다. (물론 그렇다고 드라마틱하게 벌이가 나아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여의도 KBS 신관으로 첫 출근한 나는 2층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배의 안내를 받아 출입증을 받고 내부로 들어왔다. KBS의 예능국은 6층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한 층이 전부 뚫려있고 가슴께밖에 오지 않는 낮은 파티션들로 각 프로그램 팀을 구분 지어놓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내가 TV로 봤던 프로그램들의 간판이 붙어있는 걸 보니 내가 진짜 KBS예능국에 발을 들였구나 라는 실감이 들기 시작했다. 복도 양 옆으로 배치된 팀들은 각 팀마다 온갖 서류더미와 소품들과 잡동사니들이 정신없이 어질러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다들 얼마나 바쁘게 일을 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복도를 걷다가 드디어 내가 일하게 된 프로그램의 자리에 도달했다. 도착해서 선배들과 인사를 나누고 다른 여러 PD 님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내가 첫 출근한 날은 촬영 전날이었고 다들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멀뚱히 앉아만 있었는데 이때 덩치 큰 남자 한 분이 와서 인사를 건네었는데 이 팀의 메인 작가님이었다.
나를 제외한 남자 작가라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을 숨기지 못한 상태로 마주 인사를 하고 곧이어 나의 바로 윗선배 사수에게 일에 대한 인수인계를 받았다. 너무나 큰 프로그램이었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일을 배우고 시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을 정도였다. 소위말하는 멘붕이었다.
누가 봐도 영혼이 나가버린 상태의 나를 본 메인 작가님은 이번 촬영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딱 한, 촬영 현장에서 스태프들을 보고 인사를 잘하고 다니라는 한 마디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