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본방송이 끝나고 월요일 아침이 되면 시청률 조사기관에서 발표하는 시청률이 나온다. 대략 아침 7시 언저리에 시청률이 나오기 때문에 그전에 출근해서 전날 체크한 지상파 3사의 분단위 방송 내용들을 그래프로 옮기는 작업을 한다. 그래프 작업이 끝나면 다음 주 방송 내용 등을 정리한 회의 자료를 만드는데 이 자료들은 제작진이 아닌 예능국 수뇌부들의 회의에 쓰이는 자료들이다.
오전 9시 ~ 10시 사이에 예능국 국장을 필두로 하는 각 CP(차장급 PD)들이 모여서 회의를 진행했다. 이 회의에 쓰이는 자료는 내가 만들지만 실제로 그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들이 오고 가는지 어떤 회의를 하는지 일개 막내작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떨어진 시청률에 대해서 예능국장의 잔소리 또는 올라간 시청률에 대해서 예능국장의 격려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 정도를 해본다.
이 시청률 자료를 만드는 것은 같이 해피선데이로 묶여있는 1박 2일 앞 프로그램의 막내작가와 격주로 돌아가면서 만들었었다. 내가 일했던 당시에는 <남자의 자격>이라는 프로그램이 앞에 자리 잡고 있어서 그 팀 막내작가와 격주로 일을 나눴는데 내가 시청률을 만들지 않는 월요일에는 새벽같이 픽스 답사를 출발해야 했다.
지난주 작가들끼리 다녀온 사전답사 장소를 토대로 회의해서 피디, 작가들이 모두 함께 가는 픽스답사를 주말 사이에 준비하고 월요일에 출발했다. 픽스답사는 사전답사와 마찬가지로 각 장소들에 연출팀 모두 내리면 또다시 여행사 직원처럼 안내를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고 또다시 안내를 하는 일의 반복이었다.
픽스답사를 마치고 돌아오면 다음날 답사를 토대로 구성회의가 진행된다. 물론 나는 구성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전날 픽스답사 장소들을 다시 한번 회의자료로 만들어야 했다. 또다시 사진들을 배치하고 장소들에 대한 코멘트들을 정리하면 이것으로 구성회의가 시작되었다. 구성회의는 마라톤으로 진행된다.
보통 점심 이후에 회의를 시작하면 빨라야 밤 8~9시나 되어야 끝이 났고 길어질 경우에는 새벽 1~2시를 넘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기에 도무지 회의가 풀릴 기미가 안 보이면 갑작스럽게 다른 장소를 물색해서 다음날 새로 답사를 가는 일도 종종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나는 그 의견들을 토시하나 빠짐없이 회의록에 받아 적는 일을 했다. 회의는 반농담이 오고 가고 사설들이 난무해서 뭐가 구성에 대한 내용이고 뭐가 농담으로 한 말인지 구분하기 힘들 때가 많았는데 일단은 놓치지 않고 전부 받아 적는 게 중요했다.
회의가 끝나면 정신이 하나도 없는 회의록을 다시 보기 좋게 정리하는 일을 했다. 밤 사이에 회의록을 정리해 놔야 또 이것을 토대로 다음날부터 선배들이 촬영 구성안을 만들 수가 있다. 선배들이 구성안을 작성할 동안 내 발등에도 불이 떨어진다. 평소에도 정신없이 바쁘지만 이때부터는 정말 잠잘 시간도 부족할 정도로 바빠진다.
먼저 각 구성별로 필요한 소품들을 체크하고 소품리스트를 만든다. 매 촬영마다 기본적으로 챙겨가는 소품만 해도 1톤 탑차 가득이다. 그리고 각 구성별로 특수하게 구입해야 하는 소품들이 있고 또 제작해야 하는 소품들도 수십 개에 이른다. 소품리스트는 가능한 보기 좋게 1장에 모두 적어 넣었는데 리스트가 너무 많아서 1장에 욱여넣다 보니 글자 포인트가 6~7포인트 정도로 작아질 지경이었다. 이 소품들은 정확히 어떤 상황에 어떻게 쓰이며 어떤 모양새와 어떤 기능들을 하는지 체크해서 어울리는 소품들을 찾고 FD에게 구매 의뢰를 한다.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어디서 구매할 수 있는지까지 찾아주어야 한다. 그리고 특별히 제작해야 하는 것들은 제작업체와 직접 연락을 해서 시안을 받고 컨펌을 한다.
소품들은 촬영 직전까지 계속해서 주문하고 받기를 이어간다. 심지어 선배들이 구성안을 쓰다가 새롭게 추가되는 소품들도 태반이었다. 갑작스럽게 구하기 어려운 소품들을 주문하면 FD와 싸우기도 일수였다. 그렇게 매번 싸우고 화해하고를 반복하다 보니 금세 FD, 진행팀들과 친해졌고 이들은 나중에 나에게 큰 힘이 되어주었다.
소품들을 정리하면서 동시에 스태프들이 촬영 끝나고 머무를 숙소를 구해야 했다. 숙소는 가능한 촬영장소에서 가까운 곳으로 구하고 각 팀별로 방배정까지 해주었는데 이때 각 팀별로 불만사항이 많아 항상 골치가 아팠다. 이런 일들을 하는 동시에 선배들의 구성안에 필요한 정보들을 또 찾아야 했다. 각 장소들의 정보나 전체 이동구간 등 구성안을 쓰는 선배들의 요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러는 동시에 이번주 방송에 대한 시사도 이루어진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시사록을 작성하기 위해 편집실에 들어갔다. 시사록을 작성하는 와중에도 FD들의 소품에 대한 질문들이 쇄도를 하고 어레인지 했던 장소들도 문의 전화가 끊이지를 않았다. 시사를 마치고 선배들의 구성안(대본) 초안이 나오면 피디, 작가, FD 전체가 모여서 대본 회의를 하는데 이때는 전체 스케줄을 훑으면서 각자 업무분장에 대한 이야기와 혹시 놓친 부분에 대해서 마지막 정리를 했다.
대본 회의가 끝나면 나는 소품을 확인하기 위해 소품실로 내려갔다. 소품실에는 정말 온갖 잡다한 물건들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여기에 FD와 진행팀들이 내가 미리 작성한 소품리스트를 보면서 차에 싣을 소품들을 꺼내놓고 있었다. 나는 미리 꺼내놓은 소품들을 리스트를 보면서 차에 싣는 것을 체크했다. 1톤 탑차 2대 분량의 소품들이었다.
그동안 선배들은 최종으로 구성안 수정을 마쳤는데 이때가 목요일 밤이다. 보통 금요일 이른 새벽에 촬영장소로 출발하기 때문에 실제로 촬영 출발까지는 몇 시간이 채 안 남은 상황이다. 선배들이 구성안을 다 털고(탈고) 각자 짐을 챙기러 퇴근을 하면 이때부터가 온전히 나만의 세상이었다. 큐시트, 구성안, 업무분장, 소품리스트, 비상연락망 등등을 모두 출력을 하고 보기 좋게 A4용지의 절반 사이즈로 잘라서 한 부로 만들어 내는 작업을 이어갔다. 이때만큼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오로지 나 혼자만 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혼자 이어폰을 끼고 촬영 전 마지막 작업을 이어갔다.
최종 대본을 만들고 미리 싸 온 짐을 챙겨서 촬영가는 배차에 오르면 비로소 촬영의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