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라카미 하루키의 르포 <언더그라운드>를 읽고 나서
0.
이 책은, 1995년 3월 20일, 일본 도쿄에서 일어난 '도쿄 지하철 사린 사건'에 대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르포이다. 옴진리교라는 당시 일본의 신흥 사이비 종교가 개입되어 있었고, 그 신도들이 범죄에 가담하였으며, 치명적인 유독가스인 '사린(Sarin)'이 사용되었기에 엄청난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고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팬이기도 하며, '르포'라는 말이 갑자기 머리속에 떠올라서 읽게 되었다. 95년 3월을 바라보는 감각에 오늘날을 투영해 보는 것이 목적이다.
1.
어느 날 갑자기 '르포'라는 말이 머리에 들어왔다. '르포'. 말맛이 좋다. '르포'라고 읽든 '르뽀'라고 읽든 말맛이 차지다. 르포는 300번대에 속해야 할까, 800번대에 속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늘 해 왔다. 하지만 잘 모르겠다. 사실 그것은 내게 묻는 질문과도 같다. 나는 300번대의 꿈을 꾸고 있나, 800번대의 꿈을 꾸고 있나. 사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부유할 수 있기만 해도 다행일 것이다. 종착역이 그 두 곳과 상관 없는 곳이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부끄럽지만, 내게 묻는 질문에도 잘 모르겠다는 답밖에는 낼 수 없다.
2.
뒷표지를 덮으면서 가장 먼저 한 생각은, "피로하다" 였다. 거의 같은 내용의 증언이 반복되는 것을 60차례나 보아야 했다. 지면 상에서 인터뷰가 나오기 전에, 어떤 사람을 인터뷰했는지 하루키가 간단하게 평을 해 놓은 지면들이 있는데, 독특한 시각을 가진 그였기에 그 부분은 흥미로웠다. 물론, 인터뷰가 흥미롭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유사한 내용을 60차례나 보는 것은 꽤나 곤욕이었다. 같은 사건을 경험했기에 증언의 패턴이 대동소이했기 때문이다. 책장을 넘기면서 충격이 둔해지는, 타인의 충격을 지루하다고 느끼는 내가 싫었다.
그런 감정을 느낌과 동시에, 62명을 인터뷰한 하루키의 노력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또한 나는 기본적으로 내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취재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좋아하려고 노력했다.
이렇게 간단한 말로 써버리면 싸구려 센티멘털리즘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자신 속에 받아들이고 피와 살에 담으려고 했다. 의식을 집중해서 가능한 한 상대의 입장이 되어 사물을 생각하고, 상태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고, 상대의 마음으로 사물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中
한 사람 한 사람을 좋아하려고 하는 부단한 노력. 글을 쓰고 싶은 사람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태도이지만, 그걸 종종 잊고 만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맥락에서 카메라를 드는 것도 이런 태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간혹 뷰파인더 속에 담기는 대상에 대한 감정 없이, 그저 나의 유익과 만족만을 위해 셔터를 누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예순 두명의 사람들을 온전히 좋아하려고 노력하면서, 지루하고 지난하지 않게 긴 기간 취재를 이어나갈 수 있는 동기부여에 감탄할 따름이다. 반복할 뿐이지만, 놀랍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다.
3.
몇몇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런 에피소드들에서 인터뷰이의 태도에서 내가 읽은 것들은 다음과 같다. 일상의 소중함을 깨달았다는 것. 그날(사린 가스 사고) 이후로 많은 게 변했다는 것. PTSD(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를 극복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것들.
많은 일들이 지나가는 때에, 우연찮게 <언더그라운드>를 읽게 되었다. 충격적인 사고는, 유사한 사건들을 소환한다. 그리고 또 다른 사고들을 지속적으로 소환한다. 12사단 훈련병 사망은 23년 해병대 채상병 사망 사건을, 그리고 이태원 압사 사고를, 그리고 세월호를. 인터넷 환경에서는 이런 사건들을 소환하며, 저마다의 경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본인이 군대에서 경험했던 부조리라던가, 본인의 군생활이라던가, 본인의 재난/사고 현장 생존담이라던가 하는 이야기들. 이런 현상은, 아마도 저마다 PTSD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 방증일 것이다. 왜 우리네는 이런 것에 대한 감각이 부재하거나 미약할까.
(사실 대한민국 남자들이 꼭 군대 이야기를 하는 이유와, 그 묘사가 굉장히 디테일하고 생생한 이유는 PTSD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이 모여 군대 이야기를 하는 것과, 알콜 중독자 모임에서 저마다의 이야기를 하는 것 사이에 구조적 동질성이 있지 않을까?)
사회를 뒤흔든 몇몇 사건들은 우리 기억 속에 잊히지 않을 것이라고 수이 착각한다. 나 역시도 이 명제의 예외는 아니다. 이 글을 쓰면서, 사회적 파장이 컸지만 우리가 잊고 지나가던 사건이 무엇이 있었는지 의식적으로 찾아보았다. 그 결과, 23년에 있었던 수 차례의 칼부림 사건을 떠올려 본다. 그런 사건을 지나가면서, "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구나", "시대의 징후가 이런 것으로 발현되나?", "설명할 수는 없지만 후행할 큰 사건의 시발점을 목도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인가된 예언자적 발언'을 모두가 일삼곤 했었다. 마치 어떤 일이 후행하길 바라듯이. 하지만 너무나도 먼 옛날의 일인것 처럼 회고하고 있다. 세상이란게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속절없이 흘러갈 뿐이다.
그렇구나. 그래서, 그게 조금이라도 휘발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목소리를 모아, 서사를 직조해 내고 바늘코를 꿰어, 그물을 만들어 조금이라도 많이 붙잡으려는 노력이구나. 탄복할 따름이다.
4.
책 가장 마지막 부분은, <지표 없는 악몽>이라는 제목으로 '왜 르포를 쓰게 되었는가'와 '무엇을 얻었는가' 정도 되는 편집 후기가 실려 있었다. 예순 명이 넘는 사람들과 나름의 조사를 통해 얻은 그 만의 결론과 동시에 사건의 원인은, '시대정신'의 부재 정도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은 주체인 동시에 객체다. 당신은 종합인 동시에 부분이다. 당신은 실체인 동시에 그림자다. 당신은 이야기를 만드는 '메이커' 인 동시에 그 이야기를 체험하는 '플레이어'다. 우리는 많건 적건 이러한 중층적인 설화성을 지님으로써, 이 세계에서 개체로서 느끼는 고독을 치유해가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혹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유의 자아를 가지지 못하면 고유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없다. 엔진 없이 차를 만들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물리적 실체가 없는 곳에 그림자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당신은 지금 다른 누군가에게 자아를 양도해버렸다. 그럼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럴 경우 당신은 타자로부터, 자아를 양도한 그 누군가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실체를 양도해버린 대가로 그림자를 받게 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치일지 모른다. 당신의 자아가 타자의 자아에 동화되어버리면, 당신의 이야기도 타자의 자아가 만들어내는 이야기의 문맥에 동화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아사하라 쇼코는 그런 정크로서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다름아닌 그것을 갈구하는 사람들에게) 화끈하게, 또한 설득력 있게 내어 줄 수 있었다. 그 자신의 세계 인식이 거의 정크로 이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조잡하고 우스꽝스런 이야기였다. 외부자가 보면 실로 실소를 금치 못할 이야기다. 그러나 공정하게 말하자면 거기에는 딱 한 가지 일관된 것이 있다. 그것은 '무언가를 위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공격적인 이야기였다' 라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아사하라는, 한정된 의미에서는, 현재라는 공기를 파악한 희대의 이야기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는 아이디어나 이미지가 정크라는 인식을 - 의식적이었든 그렇지 않든 -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주위에 널려 있는 정크의 부품을 적극적으로 긁어모아(영화에서 ET가 주위에 널려 있는 잡동사니로 고향 행성과 교신할 장치를 조립하듯이), 거기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중략)
그러나 그에 대해 '이쪽'의 우리는 대체 어떤 유효한 이야기를 제시할 수 있을까? 아사하라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떨쳐버릴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가진 이야기를. 서브 컬처 영역에서건 메인 컬처 영역에서건 과연 우리는 가지고 있을까?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中
'이야기의 부재' 상태로 인해, 강력해 보이는 이야기를 제공하는 사람에게 자아를 양도하고 만다. 그런 이유로 옴진리교에 투신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5.
이야기의 부재. 이야기를 추동하는 힘의 부재. 그 말은 이야기를 이끄는 주체가 객체가 없다는 뜻. 영웅이 없다. 당연하다. 전 세계 어디를 가든 그렇다. 영웅이 없다는 사실이 충격을 주지 않는다. 시대와 함께 흐르는 서사도 부재하다. 다른 의미로, 시대와 함께 흐르는 서사는 존재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소비의 영역에서만 있을 뿐이고, 기나긴 축제처럼 느껴질 뿐이지 Finger Snap과 함께 끝이 나고 말았다. 소비의 영역에 존재하는 서사에 알맹이가 있는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즐거운 카니발에 그쳤는가, 의미가 남았는가 여부도 중요하지 않다.
악에 바친 힘으로 추동하는 혐오서사만이 시대 위에 정동할 뿐인가.
다시 하루키의 인용문으로 돌아가자.
그런데 당신은 지금 다른 누군가에게 자아를 양도해버렸다. 그럼 당신은 과연 어떻게 하면 좋은가? 그럴 경우 당신은 타자로부터, 자아를 양도한 그 누군가로부터 새로운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된다.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中
이 대목을 곱씹으면, 떠오르는 시쳇말이 하나 있다.
"자아의탁". 사전에 등재된 말이 아니고, 그야말로 시쳇말이기에 정확한 정의를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강의 의미는 이렇다.
"본인의 떨어진 자존감을 회복하려고 동경하는 대상에게 자신의 자아를 이입해 대상의 성공을 보면서 대리 만족을 한다는 뜻"
그리고 이 어휘의 주 용례는 '자아의탁'을 실천하는 대상을 비난하기 위한 것이다.
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인터넷 등지에서 혐오를 위해 정말 많이 사용되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추적해 보고 싶었는데, 일단 인터넷 커뮤니티에는 18년도 즈음하여 "자아의탁"이 들어간 게시물 제목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나무위키에는 "후광 반사 효과"라는 문서에 r21판부터 추가되었다. 21년도 10월 말이다. (GPT-4에게도 분석을 요청하니 2010년대 말부터 등장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었고, 20년대가 넘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사용되는 예를 발견했다고 한다.) 웹에서 가장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용례는 아이돌 산업과도 관련 이슈들이다 보니 아마도 트위터에서 시작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트위터는 아무래도 정보를 찾기가 쉽지 않다.
최근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푸바오 중국 송환' 정도가 이 단어를 범람하게 하지 않았을까. 인터넷 등지에서, 푸바오가 떠나는데 대성통곡 하는 사람에 대한 조롱이 많았다. 정말 많았다. 지상파 방송에서도 이동진 같은 사람들을 모셔놓고 이 정서에 대해 이야기 할 정도면 비단 인터넷에서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리라.
혐오의 맥락을 담고 있기에 '자아의탁'이라는 어휘가 달가운 표현은 아니지만, 하루키가 이야기한 지점과 연결되는 지점이 없지 않다고 보인다. 그런 지점에서 겹쳐 놓고 생각해보자. 옛날 같으면 자칭 '영웅', '제왕병자', '이야기꾼', '음유시인', '서사 창조자', 혹은 '재림 예수', '자칭 예수' 등등 그런 이들에게 자신을 의탁했겠지만, 지금은 의탁하는 대상의 위상이 예전과는 많이 다르다. 적어도 예전에는 '위대해 보이려는(넷플릭스 '나는 신이다'와 같은 맥락도 이것과 함께 할 것이다)' 것에 의탁했다면, 지금은 그렇지도 않다(사이비와 같은 문제와 이 시대가 완전히 단절했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푸바오나, 스포츠 스타나, 아이돌 같은 것들. 범주화시켜 과거랑 비교해 보면, 예전에는 '구도자', '메시아' 정도였다면 오늘에는 '금수'나 '광대'같은 것에 의탁한다. 시대적으로 구원이 중요한 담론이 아니라는 것을 읽을 수 있는 컨텍스트일까. 자아를 내어주는 대상이 저런 것들에 있다는 것에서 우리는 무엇을 읽어야 할까. 결국 서사가 부재하고, 무언가에게 우리를 내맡기고 있고, 옛날보다 그 대상은 범속해지고 있고, 그런 이유들로 인하여 우리는 혐오할 힘만 점점 얻어가고 있기에. 혐오만이 이 시대를 추동하는 힘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서사는 혐오서사 뿐인가?
한편으로는, 의탁의 대상이 '푸바오', '스포츠 스타', '아이돌' 정도라고 했을 때, 왜 그들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감히 넘겨짚어 보자면, 무결한 대상을 바라고 기대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열 차례 타석에서 일곱 차례 소득 없이 물러나도 흠이 아닌. 두 번 중에 한 번은 필드골을 넣지 못해도 흠이 아닌. 열 번 골문을 넣지 못해도 한번 골문을 흔들면 그만인. 혹은, 인간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애초에 가능하지 않은. 그것도 아니라면 그 어느 틈조차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사람' 상품을 동경하고 욕망하고 원하는 것에 그 이유가 있지 않을까. 이 모든 것을 종합해 보면, 사실 우리는 그 어느 그 어느 때 보다도 혐오에 힘을 쓰고 있지만, 사실 혐오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기저에 있기에. 혐오할 틈을 주지 않는 대상을 찾기 위한 옥석가르기의 여정을 어느 때보다도 가열차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완벽한 대상에의 욕망과 갈망은 사실 구원을 어느 때보다 바라고 있다는 것을 담지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완벽"에 대한 꿈을 꾸고 있기 때문에 '혐오'를 쉬지 않고 있다고 한다면, 역설적이게도 희망이 있다고 여겨도 괜찮은 것일까.
6.
서사가 없는 오늘에도, 글로 먹고 살고 싶다는 꿈을 꾸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이야기'에 대해 고민한 것 처럼, 내게도 이야기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 온 것 만 같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을까. 무엇을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일까. 사람인 이상, 인문학에 발을 담구고 있는 이상 대상이 사람일 수 밖에 없다. 나는 하루키처럼 이야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그런 것에는 통 자신이 없다. 순진하고 존경으로 바치고자 하는 일은 절대로 잘못될 수 없다고 믿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렇기에 그 말을 억지로 더 믿으려 한다. 그렇게 붙들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언더그라운드 인터뷰에 응했던 수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저 이야깃거리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상처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아래 인용문은 '언더그라운드'에서 미디어의 보도에 실망했다고 한 부분을 옮겨 온 것이다.
여하튼 저는 언론의 옴진리교 보도는 보기도 싫습니다. 보지도 듣지도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언론에 대한 불신감이 커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스캔들을 좋아할 뿐입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라고 하면서 결국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 거예요. 최근 들어 주간지를 읽지 않게 되었습니다.
- P. 115
텔레비전 보도를 보고 있으면 정말 화가 치밉니다. 옴진리교를 다루는 보도는 말도 안됩니다. 정말 어처구니 없어요. 실제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신중하게 생각해주었으면 해요.
- P. 373
그리고 매스미디어란 정말 무서운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정보, 특히 텔레비전 정보는 극히 부분적인 것 밖에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런 보도는 항상 사실의 한 면에 편중되기 때문에 일부분이 전체인 양 시청자들이 착각하게 만듭니다. 그게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제가 있던 고덴마초 역 앞에서 확실히 그런 일이 벌어지긴 했습니다. 그러나 그 주변은 아무 이상 없이 일상적인 생활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도로에는 변함없이 차가 달리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이상한 느낌이 들 정도입니다. 그러나 텔레비전 화면에는 이상 사태의 일부분만 보이더군요. 실제 인상과는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것이 텔레비전의 무서운 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P. 500
신문에 저에 대한 기사가 실렸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조금 사정이 있어 텔레비전에도 한 번 나갔습니다. 거기 나간 다음에 방송국 사람이 "반향이 대단합니다" "편지가 많이 옵니다"라고 말했지만 저한테는 한 장도 보내주지 않았어요. 엉터리라고 생각했습니다(웃음). 텔레비전에는 이제 나가고 싶지 않습니다. 절대로 나가지 않을 겁니다. 진실을 전하지 않는걸요. 진실을 전해주길 바랬는데, 방송국은 자신들 형편에 좋은 것만 방송했습니다. 제가 정말 말하고 싶은 부분은 전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우에다로 관을 옮길 때도 텔레비전 방송국 사람과 카메라맨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정은 조금도 생각해주지 않았어요. 정말 제멋대로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 내버려두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 P. 688
희생자가 거기에서 얼마나 괴로워하며 죽었는지, 매스컴은 조금도 보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런 사실은 조금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마쓰모토 사린사건 때는 약간 보도되었지만, 지하철 사린사건에 대해서는 이상하게도 그러지 않습니다. 그래서 갑자기 픽 쓰러져 그대로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거예요. 신문기사도 이거나 저거나 모두 마찬가지죠.
- P. 689 - 690
누군가를 대상으로 이야기를 할 때, 그 대상을 상처주지 않을 수 있을까?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권력관계와, 목표를 성취해 감에서 오는 자신감으로 인해 생기는 문제를 나는 잘 통제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붓이 정녕 칼보다 강하다면, 그 책임 또한 더 무거워야 합니다.
(중략)
... 따라서 나는 창검으로 이루어지는 반역에 비해 더 큰 벌을 내리지는 못할 망정 최소한 같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붓에 보내는 칼의 경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 이영도, <<피를 마시는 새>> 中
저 말이 백 번 천 번 옳다고 여기지만, 저 말 그대로 내게 돌아올 생각을 하면 아찔할 뿐이다. 익명 뒤에 숨는 나도, 비겁할 뿐이다. 벼린 말로 수이 휘두를 일만 생각하고, 뒷감당은 두려워하는 모습이 우습다. 그런 이유로, 하루키 본인이 "기본적으로 내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취재 대상자 한 사람 한 사람을, 개인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좋아하려고 노력했다."라는 말이 더욱 무겁게 느껴진다.
일본어 원문을 보지 않아서 뭐라고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好(좋을 호)를 썼겠지. 일본 영화 같은 걸 보면 이성 간에 고백하는 장면에서 저 말을 사용하곤 한다. 즉 하루키의 의도는 인터뷰 대상을 사랑하려 노력했다고 말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나도 상투적인 것이 싫다. 하루키 본인도 위의 인용문 다음에 이어서 "싸구려 센티멘털리즘"이 될까봐 경계했듯, '사랑'은 그저 두 글자 짜리 기표로 담을 수 없는 너무나도 큰 기의가 있어서, 기의를 담기에는 기표가 너무나도 작아서 싫다. 어휘의 한계에 갇힌 것이 싫다. 내 상상력이 미진한 것이 싫다.
그런 이유로, 사람을 대상 삼아 글을 쓰는 일은, 너무나도 중한 과업이기에 감당하고 싶지가 않아졌다. 작업 삼아 사람을 대상으로 글 쓰는 모든 이들을 경애하지 않을 수 없다.
여전히 문장이 가지는 힘을 믿는다. 문장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고, 이야기는 추동하는 힘이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이야기에 '사랑'하는 마음이 결여되어 있다면, 힘을 가질까. 방향을 올려, 나는 힘 있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이야기가 힘을 가지는데에 있어서 필요한, 쉬지 않는 반성을 지루하고 지난하게 여기지 아니하며 그 과정에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