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세 살, 처음으로 사회에 발을 내디뎠다. 인생 첫 출근 날, 내 마음은 온통 설렘으로 가득 했다. 바나나 리퍼블릭에서 큰맘 먹고 산 갈색 정장 스커트를 차려 입고, 목에 건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서울역을 지나 만리동 언덕을 오르며 스스로 대견했다. 이제 어른이 된 것만 같았다.
첫 월급으로 리바이스 501 청바지를 샀다. 그 시절, 송혜교가 리바이스 모델을 할 정도로 리바이스는 인기 절정의 브랜드였다. 지금 생각하면, 그 월급으로 그 청바지를 산 건 분명 사치였지만, 계산대 앞에서 느꼈던 뿌듯함과 설렘만큼은 여전히 선명하다.
하지만 행복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사회에서 마주한 현실은 내가 꿈꾸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팀장님은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고, 같은 팀의 선배들은 능력 있는 만큼 차가웠다. 이미 단단히 굳어진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는 그저 새로 들어온 낯선 존재일 뿐이었다.
그들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고 간식거리를 준비해 건넸다. 하지만 내가 노력하는 만큼, 그들의 밀어내는 힘은 더 강했다. 마치 내가 이곳에서 정착하거나 잘되면 안 되는 사람인 것처럼.
결국, 첫 회사를 오래 다지니 못하고 다른 곳으로 옮겼다. 그러나 새로운 환경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느 날, 퇴근 후 상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이 업계를 떠나는 게 어때? 넌 아닌 것 같아.”
그 말 한마디에 나는 무너졌다. 역삼동 원룸 바닥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 멍하니 있었다. 너무 슬퍼서 눈물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치 새드앤딩의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하지만, 나는 떠나지 않았다.”
그 때의 나는 연약했고, 상사의 말 한마디에 나라는 존재가 부정당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 그 상사는 업계를 떠났고, 남아 있는 건 ‘나’다. 나는 지금 업계의 임원이 되었고, 세계 각국을 오가며 일을 하고 있다. 출장 가는 비행기에 앉아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한다.
그때 내가 무너졌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가끔 타인의 말 한마디에 우리의 가능성을 재단한다. 마치 그들이 내 미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처럼. 하지만,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는 오직 나만이 결정할 수 있다.
결제 서류를 들고 부장님을 찾아갔던 날도 잊히지 않는다. 서류의 실수를 발견한 부장님은 단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내 머리를 내리쳤다. 크고 뭉툭한 주먹의 힘에 몸이 휘청였다. 이번 생에서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머리를 맞은 순간이었다. 실수한 건 맞지만, 억울함과 분노가 뒤엉킨 복잡한 감정이 밀려왔다. 화장실로 뛰어 가 한참을 울었다. 사회 초년생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더 차가웠다. 봄빛으로 가득할 줄 알았던 첫 사회생활은 감정 소모와 자존감의 붕괴로 얼룩졌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소중한 인연들도 있었다. 20대 후반, 회사에서 만난 동료들은 1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내 곁에 남아 있다. 이태원의 지하 클럽에서 밤새 함께 춤추던 그녀들은, 이제 육아와 일을 멋지게 해내며 서로를 응원하고 의지하는 친구가 되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일본계 미국인 보스도 있다. 회사를 떠나고 나니 더욱 그리워진다. 그가 해줬던 조언과 따뜻한 말들이 떠오를 때면, 다시 한번 그를 만나고 싶어진다. 그에게서 느꼈던 단단하면서도 온기 있는 에너지가 그립다. 지금쯤 그는 L.A에서 아내와 입양한 강아지와 함께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겠지.
살다 보면 수많은 만남과 이별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랐지만, 시간이 흐르며 깨닫게 된다. 어떤 인연은 스쳐 지나가지만, 어떤 인연은 삶의 중요한 순간을 함께 하는 사람이 된다. 나의 사회 생활의 시작은 녹록지 않았다. 상처를 주는 사람들도 있었고, 외로움과 두려움에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똑똑하고 유쾌한 동료들과 함께 몸과 마음이 가장 충만했던 시간도 있었다. 홍콩에서 일하면서 마이너리티로서 따돌림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 안에서도 배운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깨달았다.
어떤 결정 앞에서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 것.
대부분의 기회는 한번 뿐이니까.
망설이기보다는 일단 해 볼 것.내 방식대로, 내 속도로.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틀려도 괜찮다. 실패해도 괜찮다. 나를 증명하는 건, 내가 결정하는 것이다. 인생의
중요한 순간들이 닥칠 때, 우리는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단단하면서도 여유 있는 마음으로 그 순간을 맞이할
수 있기를. 그러면, 어떻게든 잘 해낼 테니까.
그러니 너도 해봐.
마음 가는 대로.
괜찮으니까.
- 나의 스무살을 살고 있을 또 다른 나의 스무살에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