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살쯤이었을까, 그림을 많이 그렸던 기억이 난다. 낙서라고 해야 할 수도 있겠다. 동화책의 딱딱한 첫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유광의 하얀색 공백 페이지에 빼곡하게 사람 그림을 그리곤 했다. 얼굴과 몸의 비율은 외계인 같았지만, 방긋방긋 웃고 있는 그 표정은 지금도 어렴풋이 떠오른다.
예술가 집안까지는 아니었지만, 아빠가 그림을 잘 그렸다. 아빠의 20대, 카투사로 근무하던 시절 그렸던 펜화들을 본 기억이 난다. 엽서 크기의 노스름한 도화지 위, 사실적이면서도 늠름한 자태의 큰 개 그림, 그건 엄마와 아빠가 결혼하실 때 혼수로 마련한 자개 무늬 화장대의 유리 아래 넣어져 있던 그림 중 하나였다.
딱히 선행 학습을 하며 자란 것은 아니지만, 예능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미술 실기 대회에도 종종 나갔고, 곧잘 상도 받았다. 중학교 입학 시험을 통과하고 몇 달의 공백 기간 동안, 본능적인 끌림으로 입시 미술 학원에 다녀보았다. 예술계 중,고등학교에 진학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미술에 대한 궁금함과 허기 같은 게 있었다.
고등학교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언니, 오빠들 틈에서, 나는 그냥 재미있게 그림을 그렸다. 그렇다 할 사춘기 증상도 없이 무난하게 십대를 보냈고, 공부에 엄청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었지만 늘 막연히 ‘서울을 가야한다’ 는 생각은 있었다.
수능 시험 점수가 나왔다. 평범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나에게 선생님들은 졸업 후 초등학교 또는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될 수 있는 전공을 추천했다. 그래서 두 군데 지원했다. 그리고, 호기심 반으로 ‘의상학과’라는 이름이 눈에 띄어 지원하게 되었다.
아방가르드한 멋진 옷을 디자인하고 싶었다거나, 어릴 때부터 패션디자이너가 꿈이었다는 건 아니다. 다만, 처음으로 삶의 중요한 선택을 앞두고 망설이던 내게 엄마가 툭 내뱉은 한마디가 마음을 흔들었다.
‘네가 좋아하고, 하고 싶은 거 해라’
그렇게 난 서울에 있는 패션 전공 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대학 생활을 표현할 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아무런 배경 지식 없이 들어갔지만, 4년 동안 정말 신나게 공부했다.“
실기 수업과 이론 수업이 반반이었다. 메마른 스펀지가 물을 흡수하듯, 모든 수업이 재미있고 흥미로웠다. 그림도 그리고, 원단 염색도 하고, 옷을 만들기 위한 패턴을 뜨고, 재봉틀로 직접 완성된 옷도 만들었다. (물론, 재봉틀 바늘이 내 엄지 손가락을 관통하기도 했다…)
내가 다녔던 학교는 교차 지원이 가능해서, 예체능 입시를 치른 친구들과 인문계 출신이 반반 섞여 있었다. 몇 년간 전공을 준비해 온 예술가 같은 외모와 분위기의 동기들이 인상 깊었다.
패션 드로잉 수업 시간, 누드 모델을 처음 마주했다. 내 몸통보다 큰 2절 전지를 펼쳐 놓은 이젤 앞에서, 새하얀 피부의 모델을 한참 멍하게 바라보았다. 모델과 전지를 번갈아 보며 본능적으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실화에 가까운 그림이라기보다는, 여성의 육감적인 실루엣을 짧고 뭉툭한 초크의 방향 조절과 손끝의 강약으로 표현했다.
교수님은 내 그림을 높게 들어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셨다. 파리에서 미술을 전공하셨다는 교수님은 새하얀 피부에 자주색 립스틱이 인상적인, 파리지앵 감성 물씬 나는 멋진 분이었다. 그 후로도 교수님은 종종 내 그림을 들어 올려 다른 학생들에게 보여주곤 했다. 구도가 완벽하다거나 완성도가 높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아마도 나만의 시선과 해석이 담긴, 개성 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난한 학생으로, 조금은 무채색 같았 학창 시절을 지나 우연히(혹은 운명적으로) 패션학과에 오게 되었다. 스무 살,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발적인 선택을 한 시기였다. 그리고, 나의 캔버스는 그 때부터 알록달록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