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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여보세요? 혹시 구인중인가요?

by Lucia

정말 즐겁고 다채로운 대학교 시절을 보냈다. 첫 수업 시작되기 전, 오티(O.T) 여행을 떠나 선후배들을 만날 기회가 주어졌다. 사회에서 O.T는 Over Time, 즉 초과 근무를 의미하지만, 대학 시절의 OT는 ‘오리엔테이션’이라는 명목으로 마음껏 즐기는 시간이었다. 학생 때와 회사원일 때, OT의 의미가 정반대라는 사실이 새삼 씁쓸했다.


오티에서 선배들의 권유로 인생 첫 소주를 마시게 되었다. 후배들을 사랑한다며 짗궂게 굴던 몇몇 선배들 덕분에 3박 4일 동안 불철주야 술을 마셨다. 종이컵에 소주를 가득 따라주고, 안주는 단무지가 전부였다. 선배들이 주는 술을 넙죽넙죽 받아 마시며, 강행군의 음주를 견뎠다. 그렇게 나는 입학과 동시에 ‘독한 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기숙사 생활을 하며, 남녀 기숙사의 같은 방 번호끼리 소위 ‘방팅’을 하기도 했다. 일종의 그룹 미팅이었다.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열심히 술을 마셨지만, 아무리 과음을 해도 수업은 꼭 들었다. 수업 가는 길에 쓰러지언정, 출석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이상하게 굳은 심지가 있었다. 그렇게 유쾌하고, 간혹 유치하기도 했던 대학 생활을 보내다보니, 어느새 취준생의 시기가 다가왔다.


패션을 전공하며 디자이너를 꿈꿨다. 내가 그린 그림이 패턴이 되고, 디자인한 옷이 실제로 판매되어 사람들이 입고 다니는 모습을 상상하면 그저 짜릿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경력이 없거나 부족한 신입에게는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처음’이라는 시기가 있지만, 사회는 ‘처음’을 마주한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취업을 준비하던 당시, 패션 디자이너가 되려면 키가 최소 165cm 이상이어야 한다는 말이 있었다. 디자인 재능과 키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그런 분위기가 분명 존재했다. 신입 디자이너에게는 주로 피팅 등의 업무가 주어졌기 때문일것이다. 키가 작은 나는 디자이너로서의 길을 아예 차단당한 셈이었다.

대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했고, 주어진 시간들을 의미 있게 보낸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업의 기회는 쉽사리 손에 잡히지 않았다. 취업이 간절했다. 실패할수록,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는지 더 고민했다.

밤늦게 조명이 다 꺼진 원룸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고심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들어 본 적이 있는 회사와 브랜드 이름들을 죄다 적어 내려갔다. 실기 과제를 처리하기 바쁘다는 이유로, 그동안 취업 관련 모임이나 네트워킹은 생각해 보지도 못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숙제와 리포트를 잘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졸업이 몇 달 남지 않았을 무렵, 조바심이 났다. 인생 첫 취업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갖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부딪혀보기로 했다. 수첩에 적어둔 두었던 회사들의 정보를 하나씩 검색했다. 검색을 하며 생긴 관심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고, 각 회사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들을 발견해나갔다. 흥미로운 정보나 인상적인 문구는 따로 메모해 두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인사 담당자의 번호가 적혀 있는 곳도 있었다. 고민과 망설임이 있었지만, 간절함과 ‘무대뽀’ 정신을 담아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혹시, 거기... 구인 중이신가요? ‘


상대는 회사에서 일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을 것이다. 수화기 너머로, 어린 사람이 앞뒤 설명도 없이 던진 그 질문이 어처구니가없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

지금 돌이켜보면, 좀 더 전략적으로 접근했더라면 좋았을 걸 싶기도 하다. 인생의 대부분의 만남에서, 상대에게 첫인상을 남기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때의 나는 ‘전략’이라는 단어의 의미조차 몰랐던 것 같다. 무식해서 용감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 내 전화를 받았준 사람들은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다. 질문 하나 툭 던지는 나에게 냉정하게 반응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 약간의 정적은 있었지만, 대부분 친절하게 반응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해 파악하려고 노력했고, 현재 채용 포지션이 없다는 점을 부드럽게 설명해주었다. 서류를 보내주면, 채용 기회가 생길 때 연락을 주겠다는 분도 있었다.


그 답변들은 아쉬우면서도 동시에 참 감사했다. 최소한, 내가 위시 리스트에 올려둔 회사들의 현재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간혹, “지금 마침 구인중이니 한번 사무실로 방문해보세요” 라고 말해주는 곳도 있었다.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는 말을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 후로도 여러 회사를 검색하며 온라인 지원을 이어갔고, 마침내 정규직으로 입사하는 감격스러운 순간을 맞았다.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여러개 와 있었다. 면접 기회를 주었던 회사의 인사 담당자였다. 채용을 진행하고 싶다며 다시 사무실로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다른 회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하고, 계약서까지 작성한 상태였다.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그 사실을 전하며 감사 인사를 드렸다. 조금은 불편했던 순간이었다. 동시에 정말 신기했다. ‘노력하는 자에게 기회는 온다’는 말을, 그날 비로소 제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한다면, 그 사람의 완성도보다 중요한 것이 노력과 진정성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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