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세요? 저… 오더 좀 넣으려고 하는데요. 저기...... 2만 개?
팀 언니가 프린트해서 건네준 서류를 보며 어색하게 말했다. 부자재 주문을 위해 인생 처음으로 거래처라는 곳에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피식 웃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나의 첫 마디에서 아마추어, 혹은 거의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라는 인상이 풍겼던 걸까. 괜히 무언가 들킨 듯 얼굴이 붉어졌다.
잠시 숨을 깊게 내쉰 상대 아주머니가 말했다.
“어떤 걸 몇 개 씩이요?”
팀 언니들은 인보이스에 써 있는 그대로 품목과 수량을 말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머뭇거렸다. 어른의 말대로 시키는 걸 듣고서, 초등학생이 처음으로 회사에 전화하는 기분이 이런 걸까 상상해 보았다.
“음… 지퍼 오더 하려고 하는데요..., 니켈 컬러 5,000개, 블랙 컬러 1만 개, 실버 컬러 5,000개...’
매일 입는 옷의 지퍼를 자세히 들여다 본적은 없다. 기억나는 거라곤, 겨울 패딩 의 지퍼 정렬이 잘못되어 끙끙대며 올려보려 애썼던 일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도 나와 비슷할 거라 생각한다.
하나의 지퍼가 완성되기까지는 꽤 많은 부자재가 필요하다. 봉제를 위해 사용되는 ‘테이프’, 양쪽에 부착된 ‘이빨’이라는 부속, 그리고 그 이빨들이 맞물려야 지퍼가 여닫히는 구조다. 지퍼를 올리고 내리는 데 사용하는 손잡이 부분은 슬라이더라고 부른다. 이 슬라이더도 바디, 풀 탭, 크라운이라는 세 가지 부품으로 나뉘다. 그 외에도 지퍼 하나를 완성하려면 3-4개의 부품이 더 필요하다. 사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도어떤 게 어떤 건지 헷갈릴 정도다.
수화기 너머로 아주머니의 비웃음과 무시가 내 피부로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는 웃으며 친절한 목소리로 오더를 마무리했지만, 그 웃음 뒤에 생략된 감정과 말들이 마치 들려 오는 것 같았다. 통화가 끝난 뒤 팀 언니들에게 상황을 공유했다. 언니들은 다시 거래처에 연락해서 팔로업하겠다고 했다. 나는 내 몫의 일을 해낸 걸까, 아니면 괜한 수고를 늘린 걸까. 나의 쓸모에 대해, 스스로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자괴감도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은 어리숙하게, 주어진 일들을 했다. 팀 언니들이 대화를 나눌 때면그냥 곁에서 조용히 듣기만 했다. 존재감 없이 그 자리에 ‘있기만’ 했다. 언니들이 한껏 고양된 목소리로 영어로 해외 거래처와 통화할 때, 뭔가 자극을 받는다거나 동기 부여가 되지는 않았다. 그냥 그랬다. 그렇게 몇 달이 흘렀다.
어느 금요일 밤, 대학 선배들과 동기들을 만나 진탕 술을 마셨다. 아마도 사회 초년생으로서의 은근한 스트레스가 쌓여 있었던 듯하다. 밤새도록 마셨고, 많이 웃었다. 술집을 나와 캠퍼스 안 야외 공연장에 자리를 잡고, 날이 밝을 때까지 술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바로 출근 했다. 다행히 그 날은 오전 근무만 하면 되는 날이었다. 그래도 회사에서 멀쩡할 리가 없었다. 돌이켜보면, 도대체 왜 회사를 갔을까 싶다. 아프다고 거짓말을 하고 하루 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 당시 나는 융통성 없는 사회 초년생이었다. ‘회사엔 무조건 가야 한다’라는 어설픈 신념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사무실 내 자리에 앉아 두어 시간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팀 언니들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를 데려가 혼낼 가치도 느끼지 못했던 걸까. ‘요즘 애들 정말 노답이야.’ 라 그런 말이 마음속에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가 그렇게 비몽사몽 엎드려 있다고 해서, 회사 업무에 큰 지장을 준 건 아니었다. 그저 시간을 채우고 조용히 퇴근했다. 그날의 일에 대해 누구도 얘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그냥 그렇게 찌그러져 있었다.
얼마 전, 회사의 신입 직원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저는 회사 생활이 맞는 사람인 것 같아요.“
입사한 지 1-2주만에 퇴사를 고민한다는 신입의 얼굴은 불안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팀원들이 시간을 들여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부담스럽다고 했다. 팀에 폐를 끼치고 있다는 죄책감과 압박감 속에서,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있었다.
몇 달 전에도 인턴 직원을 따로 불러 긴 대화를 한 적이 있다. 그 친구가 사무실 어딘가나 화장실에서 자주 운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직 대학생이었고, 휴학 중 인턴으로 사회 경험을 쌓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미 결론을 내린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사회 생활이 안 맞는 것 같아요.“
그들은 입사 2주, 2개월, 2년 만에 자신을 ‘사회 부적응자’로 규정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심이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쉽지 않은 순간과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 모두가 겪는 통과 의례 같은 것이다. 오늘도 자존감이 무너지는 순간을 겪었다면, 그냥 그렇게 하루를 보내도 괜찮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 그냥 그런 날인 것이다. 자존심에 금이 가는 일이 있었다면, 잠시 씩씩거리고, 때론 마음껏 우울해도 좋다. 그렇게 그날을 오롯이 보내 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리셋’ 버튼을 누르고 다시 시작하면 된다.
며칠 전 출근 길, 무한 반복으로 들었던 노래의 한 구절이 문드 떠올랐다.
‘It is a new dawn.’ (새로운 새벽이다.)
‘It is a new day’ (새로운 하루이다.)
‘It is a new life for me, yeah.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삶이다.)’
‘And I am feeling good.’ (기분이 좋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새로운 하루가 찾아 오기를. 그리고 그 하루가, 조금 더 나아지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