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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벌침같은 말투를 가진 상사

지금도생각나는나쁜x.

by Lucia

스물다섯 살, 졸업 후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한 첫 회사 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회사와 나의 ‘합’에 대해 고민하던 어느 날, 대학교 선배를 통해 새로운 회사의 신입 채용 소식을 들었다. 당시엔 신입을 뽑는 회사가 드물었기에 눈이 번쩍 뜨였다. 패션과 뷰티 등 다양한 수입 브랜드를 다루는 유통 회사에서 계약직을 모집하고 있었다. 정규직이 아니라 망설였지만, ‘브랜드’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오랜 로망이 나를 움직였다.



‘진달래꽃’의 기운으로 얻은 기회


1차 실무 면접을 마친 뒤 2차 면접이 잡혔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면접장에 들어서자, 나와 비슷한 또래의 여성 두 명이 이미 앉아 있었다. 단체 면접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못해 살짝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질문에 답했다. 면접 막바지, 갑작스럽게 장기 자랑을 해보라는 요청이 떨어졌다. 머뭇거리던 순간, 나도 모르게 가수 마야의 ‘진달래꽃’을 열창했다. 작은 회의실이 울릴 만큼 클라이맥스까지 힘차게 불렀다.

며칠 후, TOD’S라는 이탈리아 브랜드의 매니저 어시스턴트로 채용되었다는 연락을 받았고, 나는 하늘을 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2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 그때 면접에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얼마 전, 당시 임원으로 계셨던 분과 오랜만에 점심을 함께하며 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 패기 하나라면 뭐든 해낼 거라 생각했어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민망함과 함께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벌침처럼 쏘아 대던 상사와의 만남


이직 후 마주한 상사는 순정 만화 주인공 같은 긴 파마머리와 작은 체구를 가진 분이었다. 높은 톤의 목소리에서는 야무진 성격이 느껴졌고, 회사에서도 능력과 신뢰를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그리 좋은 상사는 아니었다. 매일 벌처럼 쏘아 대는 날카로운 말들은 나의 영혼을 조금씩 시들게 했다. 벌침처럼 따끔한 말을 들을 때마다 아팠고, 그 고통은 시간이 지나도 무뎌지지 않았다.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면 됐을 텐데


패션 업계에서 계절이 바뀔 때마다 디스플레이 컨셉을 바꾸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TOD’S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새벽 6시에 홀로 매장으로 출근해, 이탈리아에서 도착한 거대한 화물 박스를 풀고 디스플레이를 완성했다. 본사로부터 ”지금까지 본 디스플레이 중 최고”라는 극찬을 받았다. 하지만 상사는 그 성과를 마치 자신의 몫처럼 여겼다. 나는 그저 ‘수고했어’라는 말 한마디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상사의 표독스러운 한마디에 무너졌던 날


매일같이 쌓인 긴장과 작은 실수들로 지친 어느 날, 퇴근 후 상사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실수를 발견했어. 넌 정말 아닌 것 같아. 이 업계에서 일하는 걸 다시 생각해 보는 게 좋겠어.”

그 말에 난 그대로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던 스물다섯의 나에게, 그 한마디는 치명적인 장풍처럼 깊은 충격을 안겼다.



내 선택이 필요한 순간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기로 했다. 벌침 같은 말투에 굴복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내 부족함을 인정하되, 상사의 말이 내 진로를 결정하게 두진 않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이 업계를 떠나더라도, 그것은 오롯이 내 선택이어야 했다. 그리고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같은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반면, 그 상사는 몇 년 후 완전히 회사 생활을 접고 업계를 떠났다고 소식을 들었다.



벌침 가득한 날들 속에서 배운 것


상사의 날카로운 말들은 나를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나며 나는 나 자신을 더 단단하게 세우는 법을 배웠다. 관계 속에서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태도가 스스로의 길을 어떻게 결정 짓는지를 알게 되었다. 좋은 태도는 기회를 만들고, 그 기회가 행운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행운은 내가 더 단단해질수록 더 자주, 더 쉽게 나에게 온다. 벌침 같은 상사를 만난 것도, 돌아보면 내게는 값진 배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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