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어떤 모습일까? 구겨진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이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위아래 송곳니 사이로 느슨하게 담배를 입에 물고, 인중의 주름이 깊게 잡힌 채 몰입해 있는 미술 선생님의 모습도 떠올려 보았다.
미국 교환학생 기간 동안 내 전공은 텍스타일 마케팅이었다. 하지만 실기 수업에 대한 호기심이 꾀나 강렬했기에 드로잉 수업을 신청하였다.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과 함께 그림을 그릴 생각만 해도 기대되어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나는 그림을 전문적으로 배우진 않았지만, 어떤 과제가 주어지든 나만의 스타일로 표현할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확신, 혹은 자신감이 있었다. 드로잉 수업 수강 신청을 완료했을 때, 그 보물 상자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해서 뚜껑을 열어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들었다.
매일 광활한 캠퍼스의 잔디밭 사이를 가로질러 걸었다. 드로잉 수업이 있던 그날도, 따뜻한 햇살이 학교 전체를 두 팔 활짝 벌려 안아주는 듯 아늑한 공기가 가득했다. 다음 수업까지 여유가 있는 학생들은 잔디밭에 드러누워 수다도 떨거나, 눈을 감고 일광욕하듯 달짝지근한 낮잠에 빠져있었다. 캠퍼스가 넓다보니, 수업 사이 이동을 위해 스케이트 보드나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20여 분 정도 산책하듯 걸어가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었다.
첫 미술 수업. 잘생기고 훈훈한 느낌의 젊은 선생님이 쑥 들어왔다. 뿔테 안경에 깔끔한 티셔츠, 긴 다리가 돋보이는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었다. 그의 사진을 찍으면 어느 유럽 안경 브랜드의 광고 이미지로 바로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케치북을 앞에 두고, 두 사람씩 짝을 지어 마주 보며 앉으라고 했다. 낯선 사람과 불과 1미터 거리에서 마주 않자니 괜히 부끄러웠다. 나와 많이 다르게 생긴 내 파트너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곱슬머리 검정 머리를 가진 이 친구는 멕시칸일까, 이탈리안일까? 물론 그는 이곳에서 태어난 미국인이겠지만, 부모님이나 그의 인종적 배경이 궁금해졌다. 수업 시간 내내 아무도 잡담을 하지 않았고, 모두 오로지 마주한 대상에게 집중했다. 참고로, 나중에 깨달은 사실이지만 한 학기 동안 내 인종이나 배경을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파트너와 어떻게 그림을 그릴 것인지에 대해 교수님이 설명해주었다. 파트너의 모습을 천천히, 그리고 자세히 보라고 했다. 내 머릿 속에 저장된 사람의 형상을 그리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이는 대로 그려보라고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필을 스케치북에서 떼지 말고 한 선으로 연결해보라고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연필을 스케지북에서 떼지 말고 한 선으로 연결해 보라고 했다. 스케치북을 내려다보며 잘 그리고 있는지 확인하지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오롯이 대상을 눈에 담고, 의식의 흐름을 연필 선으로 표현하라는 설명이었다.
내 머릿속에 이미 저장된 ‘사람’의 모습에 곱슬머리의 질감을 멋지게 표현하고 싶은 욕구가 올라왔다. 그림을 못그리는 편이 아니기에, 그럴싸하게 멋지게 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교수님의 말대로 보이는 그대로 그려보기로 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상대방을 관찰하며, 그 속도에 맞춰 연필을 움직였다. 눈썹 한올 한올의 방향까지 뜯어보듯 집중하며 파트너의 얼굴을 바라보다 보니, 내 연필은 1초에 1센티미터도 채 움직이지 못했다. 연모하는 대상을 바라보듯 곱슬 머리 한 올 한올의 방향을 관찰했다. 아지랑이처럼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시아계 인종에게선 볼 수 없는 눈썹의 풍성한 볼륨과 컬이 참 아름다웠다. 얼굴 크기에 비해 입이 크고, 입술도 도톰한 편이었다. 어렸을 때, 그 입으로 해맑게 웃으며 부모님을 기쁘게 했을모습이 그러졌다.
정말 궁금했다. 결과물은 아주 흥미로웠다. 마치 피카소의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가 적절히 섞인 듯한 느낌이었다. 일부러 대상을 분해해서 그린 듯한 ‘해체주의’ 그림처럼 보였다. 전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이상하게 여겨 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눈앞의 대상에게 오롯이 집중해 나온 이 결과물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나만의 그 사람’이었다.
우리는 흔히 이미 알고 있는 것에 기대어 상대를 온전히 보려는 노력을 소흘히 하곤 한다. 나의 상식에 끼어 맞추려는 일종의 게으름이 존재한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가 아니라, ‘보이는 대로’ 상대를 느끼고 파악하는 온전함과 즐거움을 앞으로도 더 많이 발견해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