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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워크하드, 플레이하드

by Lucia

패션 브랜드에서 사회 생활을 시작해 슈즈, 의류, 언더웨어 등 다양한 카테고리에서 커리어를 쌓았다. 나는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갈증으로 무언가를 발견해가는과정을 즐겼다. 익숙해지기까지 겪는 긴장감조차 나에게 자극이자 동력이었다.


패션과 뷰티는 어떻게 다를까? 패션은 디자이너의 영향력과 시즌 테마가 중요하다면, 뷰티는 마케팅과 상업 전략이 더 중심일 거라고 예상했다. 내가 뷰티 업계에서 일한 시간을 한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일도 열심히, 노는 것도 열심히’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일도 잘하고, 노는 것도 잘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글로벌 뷰티 그룹의 아시아 지사에서 동북아시아 국가를 담당했다. 국가별로 파트너사가 많았고, 그만큼 이벤트도, 변수도 많았다. 중요하고 긴급한 일들은 무조건 당일 내에 해결해야 했다. 이동 중인 택시 안에서는 전화를, 출장 비행기 안에서는 이메일에 답하거나 발표 자료를 정리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은 금세 산더미처럼 쌓였고, 현실적으로 감당이 어려웠다. 눈을 뜨는 순간부터 메시지, 전화, 이메일 등 모든 업무 소통에 정신을 곧추세워야 했다.


그렇다고 지루하게 일만 한 것은 아니다. 가열차게 일하는 만큼, 온전히 즐기는 문화도 있었다. 한번은 동남아의 한 리조트로 전 직원이 워크샵을 갔다. 인턴부터 각 브랜드의 지사장, 최고 임원까지 모두가 열정적으로 놀았다. 항상 카리스마 넘치던 임원들이 직원들과 함께 춤추고 웃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그날 나는 새벽 1시쯤 조용히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 날 아침 8시 조식 미팅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들으니 많은 사람들이 새벽 3시까지도 놀았다고 했다. 그리고 몇시간 후,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멋진 메이크업과 단정한 차림으로 조식 미팅에 참석했다. 간밤의 피로는 보이지 않았다. 회의는 여느 때처럼 진지하고 집중된 분위기였다. 나는 이 시기에 프로페셔녈에 대해 많은 걸 느꼈다. 일할 때도, 놀 때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게 바로 프로다움이라고 생각했다.


두 개의 뷰티 브랜드의 영업을 맡으며 나는 수많은 이해관계자를 마주했다. 외부 파트너뿐 아니라, 내부 팀원, 동료, 상사 모두에게 늘 최고의 모습을 보여야 했다. 조직안에서는 서로는 서로의 눈과 귀였다. 나에 대한 평가와 피드백은 상사에게 곧장 전달되곤 했다.


어느 날, 분기 미팅을 앞두고 자료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전 부서 인원이 참석하는 회의였고,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당시 회사는 야근을 지양하는 정책 아래 일정 시간이 지나면 건물 전체가 소등됐다. 하지만 다들 퇴근한 뒤 다시 조용히 돌아와 일하곤 했다. 어둠 속 사무실엔 군데군데 스탠드 조명 불빛만 반짝였다.

회의 당일, 나는 회의실을 정성껏 세팅했다. 참석자들이 기분 좋게 향을 느끼며 들어올 수 있도록 향수도 뿌렸다. 밤새 야근으로 지쳐 있었지만, 프리젠테이션 중간중간 웃음을 유도할 농담도 준비해 두었다. 15분간 휴식 시간이 주어지고, 잠시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을 때, 보스가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다.


“루시아, 피곤해? 컨디션 어때?”


그 한마디에 나는 울컥했다. 마치 내 노고를 알아주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지금 이 방의 모든 사람들이 너를 지켜보고 있어. 너는 절대 피곤해 보이면 안돼. 생기 있고,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 끝까지 진행해. 정신 똑바로 차려.”


그날의 미팅은 성공적이었다. 나도, 보스도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돌아가는 길엔 서운함이 밀려왔다. 사람을 그렇게까지 몰아붙여야 하나 싶었고, 한동안 책임의 무게가 버겁게 느껴졌다. 체력도, 업무량도 녹록치 않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가 내 전문가 다움을 혹독하게 끌어올린 시기였다. 그리고 지금, 문득문득 내 모습에서 근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누군가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라고 물으면, 나는 마치 그 상사처럼 말한다.


“좋은 결과를 위해선 그만큼 고민해야 해요. 고민의 흔적이 바로 프로페셔널함을 만듭니다.”


이제는 의식적인 노력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좋은 에너지를 나누고, 중요한 순간들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내 모습을 본다. 어쩌면 그게 바로 나만의 ‘Work hard, play hard’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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