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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폭탄주 마시는 보스

by Lucia

할 일이 너무 많아 새벽같이 출근한 날이었다. “타타탁, 탁탁!” 멀리서 키보드를 빠르고 힘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이미 상사는 출근해 있었다. 방 안에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 타자 소리만으로 전투 모드가 장착된 그녀의 비장함이 느껴졌다.


내 보스는 홍콩 란타우 섬의 디스커버리 베이(Discovery Bay)dp 살았다. 복잡한 중심가와는 완전히 다른, 부유하고 정돈된 주거 지역이다. 영화 트루먼 쇼의 세트장을 떠올리게 하는 조용하고 여유로운 동네. 넓은 집과 바닷가 산책로가 있어 외군인 가족들과 반려견을 키우는 커플들이 많이 거주했다. 그곳에서 출근하려면 배를 타야 한다. 대부분은 집에서 선착장까지 버기(작은 전기차)를 타고 이동하고, 배로 홍콩섬에 도착한 뒤 택시를 k고 회사에 온다. 이른 아침, 그녀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건 대체 몇 시에 하루를 시작하는 걸까 싶은 생각이 들게 했다.


홍콩 보스의 이름은 이름은 아이리스였다. 아이리스 꽃을 볼 때마다, 여린 꽃 잎과 대비되는 강렬한 보라색이 인상 깊었는데, 그녀도 그랬다. 체구는 작지만 목소리, 눈빛, 걸음걸이에서 묻어나는 자신감과 카리스마는 강렬했다. 일도, 삶도, 완벽주의를 추구하던 그녀는 주말 동안 스스로를 완전히 충전한 후, 매주 월요일마다 전투 현장에 투입되는 장수처럼 등장했다. ‘이번 주는 제대로 싸워볼 준비가 됐습니까!’ 그녀의 에너지는 늘 그런 메시지를 전했다.


아이리스와는 한국 출장을 자주 함께 다녔다. 출장 중에는 내가 담당하는 브랜드에 대해 파트너사에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하고, 주요 안건을 논의했다. 파트너사 담당자들은 대부분 한국의 상위권 대학을 졸업했고 영어도 능숙했다. 그럼에도 미팅은 중간에 한국어로 전한되곤 했다. 아이리스는 상대의 목소리, 표정, 몸짓까지 세심하게 관찰하며 미묘한 뉘앙스를 이해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 옆에서 한국어로 대화하며 동시에 영어로 메모르 전달하거나, 한국어와 영어를 번걸아 말하며 상황을 중계했다. 가끔 순서가 헷갈려 아이리스를 향해 한국어로 말하다 모두 함께 웃기도 했다.


택시로 다음 미팅 장소로 이동할 때에도 긴장은 계속됐다. 잠시 창밖을 바라보거나 스마트폰을 보는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다. 잠시 멍해지기라도 하면 아이리스는 따발총처럼 물어봤다.


“이 건은 어디까지 진행됐지?”


“저 건은 통화 끝났어?”


미팅이 끝난 당일, 회의 내용과 액션 플랜을 정리한 미팅록을 반드시 작성해야 했다. 기억은 편집되기 마련이니 당일 정리가 중요하다는 점엔 공감했지만, 숨 막히는 일정 속에서 시간을 쪼개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출장 중엔 정말 매 초, 매 분이 소중했다.


한번은 명동에서의 마지막 미팅 후, 공항으로 이동하기 전 1-2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아이리스가 식사 겸 미팅록 정리를 제안했다. 전골류가 나오는 식당에 앉아 메뉴를 주문하고 ,둘 다 자연스럽게 노트북을 꺼냈다. 반찬이 깔리는 동안에도 대화 없이 각자의 모니터에 몰두했다. 그녀는 소주 한병을 시켰고, 맥주잔도 두 개 달라고 했다. 소주를 콸콸 따라 맥주잔에 가득 붓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녀는 이 정도로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을 풀고 집중력을 끌어올리는 용도로 마시는 듯했다. 어쩌면 꽤 많은 양이었지만, 그녀는 절대 취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


또 한번은 전국의 매장 직원들과 저녁 식사 자리가 마련됐다. 서울에서 시작해 부산을 거쳐 제주까지, 전 매장 직원을 만나는 특별한 일정이었다. 20-30명이 모여 삼겹살을 ㄱ워 먹으며 실적에 대한 감사를 전하고, 격려의 메시지를 나눴다. 2차로 이동한 시각은 자정 무렵, 다음 날의 일정과 자료 준비가 걱정되기 시작하던 그 때, 아이리스가 내 귀에 속삭였다.


“루시아, 나는 먼저 호텔로 돌아갈게. 너는 직원들과 조금만 더 시간을 보내고 오도록 해. 내일 아침 조식 미팅, 7시 반 1층에서 만나자.”


나는 눈빛으로 대답했고, 새벽 두 시가 넘어 호텔로 돌아왔다. 알람은 다섯 시로 맞췄다. 바깥 풍경이 좋은 방이었지만, 통창 너머 풍경을 감상할 여유는 없었다. 노트북 화면에 반사된 내 얼굴을 바라보며 문서를 다듬었다. 다음 날 아침, 단정한 메이크업과 복장으로 조식 미팅에 참석했다. 아침 인사는 간단했다. 피곤하냐는 질문도, 어젯밤 늦게까지 고생했다는 말도 없었다. 그저 노트북을 켜고, 회의 안건에만 집중했다. 마치 어제의 새벽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이리스 덕분에 내 회사 생활은 꽤 터프했다. 한동안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더 여유 있게 일하고 싶고, 디테일엔 관심 없는 상사와 일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모든 걸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가장 먼저, 가장 자주 떠오르는 상사 중 한 명이 아이리스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미친 듯이 일하고 있을까?”


삶이 일에 매몰되어 있는 그녀의 모습이 항상 좋아 보인 건 아니지만, 요즘 가끔 내 안에서 그녀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아이리스와의 인연은 길지 않았지만, 동료를 통해 그녀가 싱가포르로 승진 이동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역시 그녀답다. 컴포트 존에 머무리지 않고 자처해서 다음 도전으로 떠났을 것이다.


나는 그녀처럼 워커홀릭이 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이리스와 보낸 시간의 가치가, 마치 복리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사회생활 20년 차인 지금, 아직도 갈 길은 멀지만 감히 한마디 하고 싶다. 인생에서 몇 번은 전력 질주하 듯 몰입해 보라고, 평소에는 본인의 에너지를 80%만 써도 좋다.


하지만 인생에 세 번, 아니 네 번쯤은 엔진을 풀 가동해 전력 질주하길 권한다. 그렇게 쌓인 내공은 이후 연료를 덜 써도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엔진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당신도 누군가에게 기억나는 상사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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