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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10cm 의 자존심

by Lucia

내가 일했던 뷰티 회사는 업계 1위를 자랑하는 거대한 프랑스 그룹이었다. 다양한 가격대와 고객층을 아우르는 수십 개의 브랜드를 운영하며, 마치 세상의 모든 고객을 포섭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동종 업계에 비슷한 규모의 미국 회사가 있었지만, 매출 차이가 크지 않았음에도, 늘 프랑스 회사가 업계 1위 자리를 지켰다.

2위는 1위를 따라잡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자하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두 회사를 모두 경험해 보지 않았고, 깊은 통찰력을 가진 것도 아니기에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할 수는 없다. 다만, 1위를 1위답게 만드는 아주 작은 차이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 한 가지 경험이 있다.


현장에서 발견한 10센티미터


프랑스 뷰티 회상서 일하던 당시, 나는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정기적으로 매장을 방문했다. 서울부터 부산, 제주까지 전국을 다니며 필드 직원들과 대화를 나누고 매장의 상태를 점검했다. 디지털화가 일상화된 시대지만, 리테일 업계에서는 여전히 아날로그적 감각과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직접 방문하면 매장 직원들의 표정과 말투에서 에너지를 읽을 수 있다. 이들이 동기부여가 잘 되어 있는지, 일하면서 어떤 고민을 안고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사진 속에서는 멀쩡해 보였지만 실제로는 바닥이 구두 굽에 마모돼 있거나, 오래된 집기가 고객에게 최상의 경험을 주지 못하는 경우 같은 것이다.

그 날도 현장을 점검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계약서에는 매장 대면 너비가 5.5미터로 명시되어 있었지만, 공사 완료 후 직접 재보니 실제 너비는 5.4미터에 불과했다. 딱 손바닥 한 뼘, 10센티미터가 부족했다. 그 때 나는 고민에 빠졌다. 과연 이 10센티미터의 차이가 매장의 미학이나 운영 측면에서 큰 영향을 미칠까?


보고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당시 내 상사였던 아이리스는 한국, 일본, 중국, 동남아 등 여러 나라 총괄하며 늘 바쁘게 움직였다. 이런 사소한 문제를 굳이 그녀에게 보고해야 할까? 솔직히 내가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지 못하고 지나갈 일이었다. 괜히 일을 키울 필요도 없어보였다.

하지만 나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여겼고,내 원칙을 따르기로 했다. 결국 아이리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내 의견도 함께 전달했다.

“추가 비용을 들여 공사를 다시 하기보다는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습니다.”

“아니, 무슨소리야. 비용이 얼마가 들더라도 다시 공사하세요.”

그녀의 반응은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주 작은 공간이라도 매장 옆 브랜드에게 우리 공간을 자진 양보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1위 브랜드로서의 자존심과 상징성을 지키기 위한 결정이었다. 당시 나는 솔직히 이해되지 않았다. 천만 원대의 공사비를 들여 10센티미터를 늘리는 일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0센티미터의 상징성


시간이 지나고 경력이 쌓이면서, 나는 아이리스의 판단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매장 도면의 숫자는 단순히 수치를 넘어 브랜드의 태도와 철학을 보여주는 상징이 될 수 있다. 비용이나 효율보다, 리더의 입장을 지키기 위한 선택은 종종 더 깊은 의미를 가진다.

실제로 당시에 함께 일하던 파트너들은 우리 회사와 일하는 게 너무 피곤하다며 농담처럼 푸념을 하곤 했다. 도면 하나를 결정하는 데에도 버전이 수십 개씩 나오고, 의사 결정에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불평했다. 반면 경쟁사였던 미국 브랜드는 쿨하고 빠르게 일한다고 했다.

하지만 리더십이란 단순히 쿨한 태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에 유명한 명품 브랜드가 많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함께 일하는 파트너사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리더로서의 긴 호흡과 치밀한 기준을 지키는 것이 더 본질적이다.



리더의 자존심, 손바닥 한 뼘의 차이


업계 1위는 매출로 결정되지 않는다. 리더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태도와 선택은, 겉으로 보기엔 사소한 10센티미터에서 시작된다. 손바닥 한 뼘의 자존심은 결국 브랜드의 상징성과 철학을 만들어낸다. 그 작은 차이가 1위와 2위를 가르는 결정적 요소가 될 수도 있다. 리더는 단지 높은 자리에 앉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끝없는 고민과 실행의 결과다. 그리고 그 치열함은 10센티미터 너비의 매장에서도 증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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