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just like you”
런던에서 홍콩으로 돌아오며 인생의 새로운 챕터를 시작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다시 홍콩이라는 도시에 말을 디딘 건 인연이자 운명이었다. 행복했던 순간도, 힘들었던 기억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그 곳으로.
홍콩에 거주하는 외국인들 중 일부는 이 도시를 홍콩(Hong Kong)이 아닌 홈콩(Home Kong)이라 부른다. 외지인으로서의 삶이 늘 쉽지만은 않지만, 이 도시가 가진 매력에 빠지다 보면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온다. 나에게도 홍콩은 그런 도시, ‘홈콩’이었다.
글로벌 뷰티 회사에 임사하며 다시 시작된 홍콩 생활, 집을 구하고, 오랫동안 캐리어 속에 구겨져 있던 옷들을 꺼내 정리했다.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구직 활동을 이어간 끝에 얻은, 절박함과 열정, 그리고 끈기가 맺은 결실이었다. 그래서 더 마음과 몸을 제대로 정비한 뒤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홍콩에서 일을 시작했지만, 런던에서 함께 공부하던 팀과는 여전히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완차이 역 근처 퍼시픽 커피(Pacific Coffee)에 앉아 아메리카노와 크루아상을 앞에 두고 화상 미팅과 채팅으로 의견을 나눴다. 마지막 과제를 무사히 마무리하고, 서로의 미래를 축복하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문득, 보고 싶었던 사람들, 좋아했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이 올라왔다. 그 중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코디Cody였다. 런던으로 떠나기 전 몇 달 동안, 7-8차례 면접을 통해 알게 된 일본계 미국인. 그는 단순한 면접관 이상의 인상을 남겼다. 그의 말투과 태도에서 느껴지는 긍정의 에너지, 그리고 단단한 품격은 진정한 어른의 모습처럼 다가왔다.
나는 코디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안부를 묻고, 한번 만나고 싶다고. 그는 용건을 묻지 않고 흔쾌히 허락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그때는 내가 구직 기회를 위해 연락한 줄 알았다고 했다. 그의 사무실에서 우리는 다시 만났다. 어색한 공기를 걷어내듯, 나는 솔직히 말했다.
“I just like you”
“그냥, 당신이 좋아서 뵙고 싶었습니다.”
그 말은 사랑 고백이 아니라, 존경과 호감을 담은 표현이었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점에 서서, 나는 그의 조언과 기운이 필요했던 것 같다. 짧게 안부를 나누고, 뷰티 업계에서의 새로운 시작에 대해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그리곤 파리 여행 중 사 온 티 백을 선물로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그 이후 나의 일상은 말 그대로 ‘빨리 감기된 영화’ 같았다. 매달 해외 출장이 이어졌고, 방 한켠에는 언제나 캐리어가 펼쳐져 있었다. 정신없는 일정이 계속되던 어느 날, 코디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번엔 그가 나를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나 역시 용건을 묻지 않고, 기꺼이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날은 마침 해외 출장에서 돌아오던 날이었다. 공항에서 곧장 캐리어를 끌고 그의 새 사무실로 향했다. 코디는 1년전부터 새로운 브랜드의 아시아 지사장으로 부임해 새로운 팀을 꾸리는 중이었다. 그는 A4 용지 위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가며 자신이 그리고 있는 조직의 모습과 비전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 내 왼팔이 되어 줄래요?”
얼마 후, 우리는 다시 만나 함께 일하게 되었고, 이 후 5년간 ‘크리스찬 루부탱’ 이라는 브랜드에서 한 팀으로 일했다. 당시 나는 뷰티 업계에서 커리어를 쌓아가던 초입이었고, 쉽사리 결정할 수 없는 제안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 확신이 있었다. ‘이 사람과 함께라면 인생이 더 좋아질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의 왼팔이 되기로 했다. 사람의 인연은 참 신비롭다. 진심은 결국 전달된다. 때로는 그 진심이 삶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 지금의 내 인생처럼. 내가 존경하는 사람과 함께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내게 준명 큰 행운이었다. 그와의 인연을 통해 나는 일뿐 아니라 사람과 인생에 대해 더 깊이 배울 수 있었다.
진심은 결국 길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