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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코리아지사 만들기

by Lucia

코로나로 인해 전 세계가 멈춰 버렸던 그 시절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감금 아닌 감금을 경험했던 시간, 정말 실화였을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재택근무를 하던 때였다. 눈 뜨자마자 컴퓨터를 켜고 일을 시작하며 시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쓸 수 있다는 점은 좋았다. 하지만 하루 종일 같은 옷을 입고 공간의 변화 없이 집에만 있다 보니, 점점 나 자신이 이상해 지는 기분도 들었다.


홍콩은 2000년대 초반 사스 사태를 겪은 경험이 있어서인지 전염병에 훨씬 민감하게 대응하는 편이다. 회사 동료가 감기에 걸리면 출근하지 말 것을 강력히 권고한다. 우리 나라가 ‘아파도 출근’ 문화라면, 홍콩은 ‘아프면 나오지 마라’는 분위기다. 그런 문화 덕분에 코로나 기간 동안은 특별한 이슈가 아니고선 대부분 집에 머물렀다. 나역시 코딱지만한 홍콩의 방 대신, 숨통 트이는 한국 집에서 당분간 재택근무를 하기로 했다.

그 즈음, 루부탱 브랜드의 새로운 보스 프랑소와로부터 전화가 왔다. 한국의 카카오톡처럼 외국에서 널리 쓰는 메신저 앱 왓츠앱(Whatsapp)을 통해 걸려온 보이스 콜이었다. 새로운 상사가 부임했지만 나는 아직 한국에 머물고 있었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라 통화 전부터 긴장이 됐다. 목을 가다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How are you, Lucia?”


“I am good, and you?”


어색한 인사를 주고 받은 뒤, 그가 말했다.


“우리 브랜드의 한국 지사를 설립하기로 했어,”


“......”


놀라움, 기쁨, 설렘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 속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내가 내뱉은 한마디는 “really?”였다. 좀 더 프로페셔널하게 받아쳤으면 좋았을텐데, 나는 그렇게 루부탱 본사로부터 한국 지사 설립 프로젝트를 전달 받았다. 내가 담당하고 있던 아시아 국가 중 하나이기에, 한국 법인 설립에도 함께하게 되었다. 전화를 끊고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 루부탱에서 근무중인 전 세계 직원들 가운데 한국인은 나 혼자. 나는 마치 오래된 명화 속 잔다르크처럼 깃발을 들고 앞장서 나아가는 여성의 모습처럼 스스로를 떠올렸다. 그만큼 진지했고, 사명감도 컸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오바였던 것 같기도 하다.


한동안은 안절부절 못했다. 밥을 먹으면서도 머릿 속은 온통 법인 설립과 관련된 일들로 가득했고, 마음은 산만했다. 재택근무 중이었기에 곁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나는 혼자서도 분주하게 일했다. 한국이 하루 일과를 마무리할 즈음인 오후 4-5시, 파리 본사는 이제 막 하루를 시작한다. 시차로 인해 의사 결정이 늦어지지 않도록, 새벽까지 일했다. 파리 직원들이 점심에서 돌아오는 시간을 계신해 새벽 1시, 2시에도 키보드를 두드리곤 했다. 어느 날, 신세계 강남 루부탱 매장 직원이 내게 물었다.


“잠은 좀 자세요?”


새벽에 보낸 이메일을 보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건넨 말이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벽까지 일한 건 아니었다. 누구의 지시도 아니었지만, 그날 내가 해야 할 일들과 요청해야 할 업무들을 마치고 나면 새벽 2시였다. 물론 다음 날은 유연하게, 조금 늦게 업무를 시작하기도 했다.


20대 중 후반부터 함께한 친구 무리에게 한국 법인 설립 얘기를 털어놓았다.프로젝트를 혼자 끌고 가는 부담감, 동시에 배움의 기회가 엄청나다는 이야기를 했다. 한참을 듣고 있던 친구가 진지하게 말했다.


“야, 루시아.’ …… 튀어”


대기업에서 일하는 그 친구는, 이런 규모의 프로젝트를 혼자 맡았다가 잘못되면 비난만 뒤집어쓸 수 있다고 걱정했다. 큰 책임은 혼자 질게 아니라고. 일 터지기 전에 이직하라고 말했다. “그러게 말이야’ 나는 겉으론 맞장구쳤지만, 속으론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심리였는지 지금도 확신은 없지만, 오기가 생긴 건 분명했다.. 이 프로젝트를 완벽하게 마무리해 결과를 보여주고 싶었다. 보상이나 승진을 기대했던 것일까? 그런 마음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는 그냥, 나 자신을 증명해 보고 싶었다.


법인 설립 첫 단계는 가상 오피스 주소 등록이었다. 물리적인 공간 없이도 사업자 등록을 위한 절차였다. 수입, 통관업체도 찾아야 했는데, 나느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배울 의지는 있었지만, 정작 무엇을 모르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수입된 상품을 보관하고, 매장에 출입고 작업을 지원해 줄 물류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를 찾아 김포, 인천, 이천 등 현장을 방문했다. 비용, 보관 조건 등을 비교하고, 일하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며 분위기를 파악했다.


사무실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신사, 청담, 압구정 일대의 매물을 수십 군데 돌아다녔다. 장단점을 분석하고, 임대차 계약을 위해 변호사와 함께 중계업소를 방문해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당시 건물주는 ”이 건물은 터가 좋아서 비즈니스가 잘될 겁니다.“ 라고 말했다. 비록, 형식적인 말일 수 있지만, 그 한마디에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계약서를 봉투에 담아 나오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게 내 집 마련하는 사람들 심정일까?“


시멘트 마감만 되어 있던 루부탱 미래의 사무실을 여러번 찾았다. 파리 본사의 디자인 팀이 멋지게 디자인 해줄 걸 알면서도, 나는 혼자 머릿속으로 공간을 시뮬레이션하며 흐뭇해했다. 결국, 별 탈 없이 법인 설립은 완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몇 달 사이,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회사를 대하는 태도도, 일을 바라보는 시야도 더 넓고 깊어졌다.


인생에서 늘 회사 일에 몰입하며 자신을 다 내어줄 순 없다. 하지만 한두 번쯤은 자신의 에너지를 120% 가동해 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겐 루부탱 한국 법인 설립 시기가 바로 그런 시간이었다. 스스로를 자발적 동기 부여하여, 새로운 레벨의 나를 마주한 시간, 만약 그런 시기가 찾아온다면, 망설이지 말고 두 팔 벌려 환영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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