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비통아니고루부탱
홍콩에서 일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프랑스인, 홍콩인 등 다양한 헤드헌터들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홍콩 시장에 새롭게 도착한 ‘나’라는 상품의 상품성을 가늠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그 당시 내 영어는 유창하지 못했고, 긴장한 탓에 대화는 더욱 매끄럽지 못했다. 여유 있는 척 하려다 오히려 더 어색해졌다. 한 프랑스계 헤드헌터는글로벌 슈즈 브랜드에 대한 나의 이해도를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순간,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글로벌 럭셔리 슈즈 브랜드 랭킹 기사가 머리를 스쳤다.
미국 드라마 ‘섹스 앤 더 시티’로 유명세를 탄 ‘마놀로 블라닉’, 전지현 주연의 드라마 ‘별 에서 온 그대’에서 다시 주목받았던 ‘지미추’,그리고 이름만 들어도 모두가 알 법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슈즈 브랜드들. 멋지게 설명하고 싶었지만. 영어 실력도, 브랜드 지식도 모두 부족했다. 전화기 너머로 빨개진 내 얼굴이 보일 것 같아 부끄러웠다. 내 수준을 파악했는지, 그 헤드헌터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 후 나는 새로운 도시의 생활 방식과 회사 문화에 적응해 나갔다. 이제는 프랑스 브랜드 이름을 특유의 프렌치 억양을 담아 제법 그럴듯하게 발음할 수 있다. 그 때 그 헤드헌터 앞에서 말했던 ‘크리스찬 루부탱’이라는 단어가 어쩌면 말한 것이 내 인생과 마법 같은 연결 고리를 만든 걸까. 나는 루부탱이라는 브랜드에 우연히 인연처럼 입사하게 되었고, 아주 열정적으로 일했다. 활활 불태우듯, 아주 빨갛게.
루부탱? 뭐라고? 루이비통? 발음이 비슷한 탓에 자주 혼동되지만, 크리스찬 루부탱(Christian Louboutin)은 신발 밑창이 빨간색으로 마감된 독보적인 스타일로, 할리우드 스타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으로 자리매김한 럭셔리 슈즈 브랜드다. 루부탱 슈즈를 신고 걸을 때, 뒷모습을에서 살짝 보이는 밑창의 레드 컬러는 단연 시선을 사로잡는다. 어느 날, 8.5cm 루부탱 힐을 신고 롯 백화점 명동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대리석 바닥을 따라 또각또각 울리는 힐 소리 덕분인지, 내 걸음마다 자신감이 차올랐다.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타자, 뒤에 서 있던 서양 여성 두 명이 내 신발에 대해 속삭이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여성들의 로망인 루부탱을 내가 신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묘하게 들떴다. 선명한 로고가 박힌 명품을 사는 이들의 마음이 이런 걸까?
루부탱의 신발이 처음부터 빨간 바닥을 가졌던 것은 아니다. 브랜드 초창기, 디자이너 크리스찬 루부탱은 팬지꽃에서 영감을 얻어 구두 디자인을 구상하고 있었다. 하얀 도화지 앞에서 오래 고민한 끝에 팬지꽃의 실루엣을 스케치했지만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고민하던 중, 그는 우연히 비서가 의자에 앉아 빨간 매니큐어를 바르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순간, 루부탱의 머릿속에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나른한 모습으로 의자에 기대어 앉아 빨간색 매니큐어를 바르고 있었다. 그 순간, 루부탱의 머릿 속에 반짝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는 매니큐어를 집어 들고 신발 밑창에 과감히 칠했다. 마치 원래부터 그래야 했다는 듯이,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드 솔(Red Sole)’, 빨간 밑창의 첫 루부탱 슈즈였다.
루부탱은 지금도 매 시즌 수백가지의 새로운 슈즈를 디자인하며, 여전히 열정적으로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신발들은 여성의 곡선을 따라 만들어지는 아름다운 커브 덕분에 예술 작품처럼 여겨진다. 단순한 신발이 아니라, 보관하고 싶은 오브제이자 전시하고 싶은 예술품으로 존재한다.
그의 슈즈가 특별한 또 하나의 이유는, 루부탱이 신발을 디자인할 때 언제나 그것을 신는 여성을 염두해 둔다는 점이다. 스케치를 할 때도 신발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여성의 발목과 다리 라인을 함께 그린다. 단지 도화지 위에서 멋져 보이는 예술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다. 루부탱은 신발을 신었을 때의 실루엣, 그 순간의 그녀들의 눈빛과 태도까지 상상하며 디자인한다.
소녀에서 숙녀로 성장해 인생 첫 구두를 고르는 날, 반짝이는 눈빛으로 루부탱 매장에 들어와 케이트(KATE) 모델을 신어보는 사람. 모자를 푹 눌러 쓴 30대의 남성이 수줍게 매장을 찾아 여자 친구에게 줄 신발을 고르는 모습. 중요한 프리젠테이션이 있는 날, 클라이언트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싶은 날,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 넣고 싶은 날, 내 인생의 특별한 날. 다양한 이유로 루부탱을 찾는 사람들. 매장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화사한 색감과 눈부신 컬렉션을 마주하며 활짝 웃는 중년 여성까지. 이들이 모두 내가 크리스찬 루부탱 부띠크에서 만났던, 알록달록한 고객들의 모습이다.
내 인생에서 심장만큼이나 빨갛고 뜨거웠던 시간, 루부탱과 함께 했던 순간들의 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었다, 한 브랜드를 만나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 속에서 더 성장한 나의 이야기를. 그리고 내 엔진을 120% 가동했던, 가장 열정적이었던 시기의 찬란한 기록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