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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경력 10년차 취준생

by Lucia

런던의 한복판의 리젠트 파크 바로 옆에 자리한 런던 비즈니스 스쿨의 캠퍼스에 내가 서 있었다. 청량한 하늘, 흐드러진 구름, 바람 곁에 흔들리는 거목들. 그 풍경이 마음을 사로 잡았다. 그날의 기분을 잊을 수 없다. 매일 이런 날씨를 매일 마주하니, 유럽에서 위대한 예술가들이 많이 탄생한 이유를 조금은 알거 같았다.

추운 겨울, 귀가 새빨개질 정도의 날씨에도 건물 밖 거리에는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직장인들과 북적이는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이 활기찬 도시, 런던의 명문 캠퍼스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사실은 행운 그 자체였다.


캠퍼스 내에서의 일상은 무척이나 행복했지만,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빠듯한 통장 잔고는 외면하고 싶을 만큼 무거웠다. 학생 신분으로 수업을 듣고 과제를 제출하고 있었지만, 몇 달 뒤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대학교 졸업 이후 단 한번도 공배기를 가져본 적 없던 내게, 그 불확실성은 큰 두려움이었다.


닥치는 대로 구직 활동을 했다. 틈날 때마다 회사 정보를 검색하고, 이력서를 업데이트했다. 지원하는 회사와 부서에 맞춰 이력서의 포인트를 달리 구성했다. 강조하고싶은 역량에 따라 최소 몇 가지 버전은 갖추려 했다. 스스로도 매력을 느끼지 못한 이력서는, 누구에게도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테니까.

부지런히 준비한 덕이었을까. 인터뷰 기회가 왔을 때 뛸 듯이 기뻤다. 룩셈부르크에 있는 회사와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을 땐 자신감 있게 통화를 시작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추상적인 질문 앞에 당황했고 결국 1차에서 탈락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룩셈부르크에서의 삶을 상상했다.


아시아 지역 포지션에 지원하면 인터뷰는 자정이 넘은 시간에 잡히기 일쑤였다. 한번은 미국 패션 브랜드의 아시아 지사와 전화 인터뷰를 기다리다 눈꺼풀이 내려 앉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한 중간이었다.


‘XXX’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욕이 튀어나왔다. 드라마를 기다리다 잠든 것이 아니라, 내 인생이 걸린 인터뷰를 기다리다 잠들었다니. 나 스스로 참 실망스러웠다. 절망감에 고개를 떨구던 그다음 날, 그 브랜드로부터 연락이 왔다. 인터뷰 담당자가 긴급한 업무로 자리에 못 나왔고, 사과의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오 마이 갓!”. 신이 나를 불쌍히 여겨 기회를 한 번 더 준 걸까. 며칠 후, 미국에서 홍콩으로 이동한 20대 후반의 젊은 임원과 인터뷰를 다시 진행했다. 미국 사람들과 통화를 하면 기분이 좋다. 빠르고 유쾌한 대화가 마치 내게 기회를 열어주는 듯 느껴지기 때문이다. 상상은 자유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채용되지 않았다.


룸메이트 킴은 나보다 몇 주 먼저 고향 싱가포르로 돌아갔다. 나 혼자 런던 중심에 위치한 그 집의 월세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학교 근처 유스호스텔을 찾았다. 이층 침대 두 개가 놓인 네 명이 함께 쓰는 방. 내 개인 공간이라곤 침대 옆 이민 가방 두 개를 세워 둘 정도가 전부였다. 배낭 여행객이 며칠 묵을 그 공간에서 나는 몇 주를 살아야 했다.


조촐한 환경을 받아들이지 못한 건 아니었다. 다만, 혼자서 인터뷰를 준비하기엔 마음이 조금 복잡했다. 여행 이야기로 웃음꽃이 피는 방 한쪽에는 나는 조용히 자기 소개서를 다듬고, 면접 질문을 연습했다. 유스호스텔의 공유 공간에서는 인터뷰가 어려웠기에, 자정이 넘은 시간 인터뷰가 잡히면 캠퍼스로 향했다. 단호한 마음을 먹어도, 인적 없는 유럽의 밤거리를 혼자 걷는 건 두려웠다.


캠퍼스의 한적한 책상에 앉아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날은 홍콩의 대형 뷰티 기업 영업 담당자와의 인터뷰였다. 혼자 입 근육을 풀고, 환하게 웃는 연습도 했다. 자정이 넘은 시간, 밝고 활기찬 중국인 인사 담당자와 질 높은 대화를 나눴다. 이후, 카리스마 넘치는 말투의 홍콩 임원, 또 후엔 프랑스 임원과의 인터뷰가 이어졌다. 새까만 밤하늘을 뚫고, 나는 매번 다시 캠퍼스로 향했고, 그렇게 인터뷰를 마쳤다.


그리고 마침내, 그 회사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절실함이 길을 열어주었다. 결국 행운을 만드는 건 절실함이다. 계획에 없던 길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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