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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다양성에 대하여

by Lucia

‘멜팅 팟(Melting pot)’이라는 표현이 있다. 다양한 사람과 사상이 섞여 있는, 마치 용광로 같은 공간을 말한다. 전 세계의 매력적인 주요 도시들을 떠올리면, 뉴욕, 런던, 파리, 홍콩 등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이 도시들이 지리적 위치나 역사적 배경 덕분에 유명해졌을 수도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이들 도시에 공통으로 흐르는 힘은 ‘다양성’이다. 다양한 문화와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질 때만 만들어 질 수 있는, 마법 같은 에너지가 있다.


물론 다양한 문화가 항상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관점과 의견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이면 혼란과 충돌이 따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충돌 속에서야말로 기존의 사고방식을 깨뜨리고, 더 나은 아이디어와 결과가 탄생한다고 믿는다.


가끔은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이 아쉽게 느껴지기도 한다. 바다와 북한 외에는 인접국이 없는 반도 국가라는 점은 단일 민족성과 고유한 문화적 색깔을 지키는 데는 이점이 있었지만, 새로운 사상이나 문화에 익숙해지는 데에는 상대적으로 훈련이 부족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걍의실을 꽉 채운 70개국의 사람들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의 첫 수업 날, 캠퍼스를 걸어 들어가는 길은 낯설지만 설렘으로 가득했다. 수업 시간이 가까워지자 100명 가까운 학생들이 강의실을 가득 채웠다. 빈자리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빼곡히 앉은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콩나물 시루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렇게 다양한 피부색과 머리 색을 한자리에서 본 건 생애 처음이었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주황빛 머리카락과 눈썹이 인상적인 남학생에게 시선을 머물렀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는 아시아계 여학생을 보며 국적이 궁금해졌다. 윤기나느 다크 초콜릿처럼 깊은 피부색을 지난 여학생, 숯검댕이 같은 진한 눈썹과 곱슬머리를 가진 남학생은 중동 출신일까 짐작해보기도 했다.


교수님은 ‘예’ 나 ‘아니오’로는 대답할 수 없는 개방형 질문을 던졌다. 잠깐의 정적 후, 강의실 여기저기서 얼굴만큼이나 다양한 생각과 답변들이 쏟아졌다. 내게는 상상조차 못했던 관점들도 있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머릿속에 심어진 생각의 씨앗이, 내 안에서 작동하는 운영체제를 최신 버전으로 업데이트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조금 더 나은 나로, 한 단게 성장한 기분이었다.



‘다양성’을 축하하는 날


어느 날, 학교 홈페이지에 자원봉사자를 모집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매년 열리는 ‘다양성 축제’의 스태프로 참여할 사람을 찾는 내용이었다. 내 역할은 맥주 텐트에서 방문한 학생들에게 원하는 맥주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행사 당일, 자원봉사자들에게 제공된 티셔츠에는 다양한 외모의 사람들이 나란히 서 있는 그림이 그러져 있었다. 미국, 유럽, 중동, 인도, 아시아게 등 다양한 배경을 가진 학생들과 마주하며 맥주를 건넸다. 행사는 밤늦도록 이어졌고, 클럽에 온 듯한 음악이 밤하늘을 채웠다. 런던비즈니스스쿨 건물 외벽은 음악에 맞춰 각국의 국기로 물들었다.

한국 국기가 빌딩 전체에 투사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이어서 수십 개 국기가 차례로 겹쳐 나타나는 순간,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함께 수업을 들으며 친해진 레바논 친구와 나란히 서서 목이 터져라 환호했다.

그날 밤의 강렬한 경험은 훗날 내가 회사 생활에서 D.E.I(Diversity, Equity, Inclusion:댜양성, 동등함, 포용성) 위원회 활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일상에서 이 세단어를 마주할 기회는 많지 않지만, 내가 이 가치를 믿고 실천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에게 작은 영감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기억을 덮는 색, 다양성


런던에서 지내는 동안, 빠듯한 재정 탓에 마음의 여유가 부족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밤의 강력하고 알록달록한 기억은, 런던에서의 모든 순간을 아름답게 덮는 색이 되었다.

얼마 전, 나는 큰 기대 없이 스위스 제네바로 출장을 다녀왔다. 내 짧은 지식 속 제네바는 조용한 도시, 자연경관이 좋은 평화로운 곳이었다.

하지만 며칠 머문 후, 나는 제네바의 또 매력에 빠져들었다. 르만 호수를 따라 걷고, 기차역 근처 골목을 누비바 보니, 터키, 이란, 인도 음식점들이 줄지어 있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Seoul’이라는 이름의 한식당도 있었는데, 너무 인기가 만하 밤 9시 반이 지나야 워크인 입장이 가능할 정도였다.


앞으로도 제네바로 출장을 갈 일이 종종 생길 것 같다. 다시 그 곳을 찾을 생각을 하니 마음이 설렌다. 서로 다른 외모와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에너지 속에서, 나와 가치관이 조금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새로운 영감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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