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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변잡기 Jun 18. 2024

불편한 계절에 대한 사색

올여름은 유난히도 뜨겁다.


아스팔트 위로 꿈틀대는 열기, 숨이 턱턱 막히는 후덥지근함.


살갗으로 느껴지는 태양의 울컥거림에 도시는 연일 몸살을 앓는다.


집을 나설 때마다 내리쬐는 햇볕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변호사로 일하면서부터, 여름은 늘 고역이었다.


아침이면 클라이언트를 만나기 위해 뙤약볕을 뚫고 사무실로 향했다.


구두 밑창에 달라붙은 아스팔트의 열기가 발바닥을 태웠다.


에어컨이 없는 법정에선 땀에 젖은 셔츠가 등에 달라붙곤 했다.


펜 잡은 손에선 땀이 비 오듯 떨어져 서류를 적셨다.


여름 내내 에어컨 바람과 얼음주머니에 의지해 살았다.


그러다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병원에선 '냉방병'이란 진단을 내렸다.


한여름 찬 바람을 자주 쐬어 생긴 불청객이었다.


더위도, 냉방병도 모두 내게는 불편한 존재였다.


피할 수 없는, 버거운 현실이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여름은 왜 존재할까.


이 못된 계절은 대체 왜 매년 찾아와 우릴 괴롭히는 걸까.


겨울의 혹독한 추위는 봄을 기다리게 하지만, 여름은 그저 참고 견뎌내야 할 무의미한 시련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득 어릴 적 여름이 떠올랐다.


아스팔트에 맨발을 들이밀며 뛰놀던 그 계절.


살갗으로 느껴지던 태양의 뜨거움은 생명력 그 자체였다.


뙤약볕이 만들어낸 아지랑이 너머로, 세상은 신비롭고 경이로웠다.


온몸으로 느끼던 열기는 오히려 우릴 들뜨게 했다.


녹음이 짙어가는 한여름, 풀벌레 소리는 생명의 찬가처럼 들렸다.


여름에 대한 기억을 더듬을수록 이상한 깨달음이 스쳤다.


내가 여름을 불편해하는 이유는, 그것이 나를 삶의 본질로 이끌기 때문은 아닐까.


문명의 욕망이 만들어낸 냉방의 쾌적함에 젖어, 본연의 자연을 거부하는 건 아닐까.


불편함을 감내하며 자연과 교감하던 시절의 감수성을, 내가 잃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여름의 찌는 열기는 우리에게 삶의 진실을 각인시킨다.


자연은 불가항력이고, 인간은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편한 것만 있을 순 없다는 것을.


불편한 것을 마주할 때 우리는 비로소 성장한다는 것을.


여름은 우리에게 그런 깨달음을 강요한다.


우리가 외면하고픈 삶의 본질을 마주하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올여름, 더위와 화해하기로 했다.


에어컨 대신 창을 활짝 열어젖히고, 밤하늘의 열기를 그대로 맞기로 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대야에도 불평 대신 감사를 느끼기로 했다.


그 속에서 잠들어가는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문명에 마비된 감각을 일깨우기로 했다.


지난 일요일, 나는 한적한 공원을 찾았다.


녹음이 짙어가는 나무들 사이로 햇살이 부서졌다.


잔디밭에 맨발로 서서, 흙의 감촉을 온몸으로 느꼈다.


땀에 젖은 살갗으로 스며드는 미풍은 생의 전율 그 자체였다.


숨 막히는 열기 속에서도 자연은 너무나 충만하고 아름다웠다.


불현듯 여름이 주는 깨달음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불편한 것을 애써 외면하기 보다, 그것을 즐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


편안함 속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삶의 충만함이 있다는 것.


우리가 결국 돌아가야 할 곳은 냉방이 아닌 자연의 품이라는 것.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공원을 떠나며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찌는 열기와 함께 공존하는 이 고요한 평화. 온몸으로 껴안는 자연의 섭리.


그 순간 나는 진정 삶의 근원과 마주한 것 같았다. 여름이 내게 가르쳐준 깊은 성찰의 시간이었다.




여름은 불편하다.


때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삶이 편하기만 할 순 없다.


불편함은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다.


그것을 받아들이고 즐길 줄 알 때, 비로소 우리는 성숙해 진다.


올 여름 나는, 찌는 열기 속에서도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맞이할 것이다.


불편함 속에서 삶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사색의 시간.


여름은 그렇게 내게 깊은 성찰을 선사한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삶의 불가항력 앞에서 한없이 겸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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