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경은 내일 다른 곳으로 떠난다..
나경이 수현에게 찾아온 것은 9월의 첫 주말 아침이었다. 나경은 불안해 보였다.
“수현아 우리 여행할까?”
“여행요….”
“갑자기 무슨 여행을 가요”
“방학도 아닌데요.”
“그냥 이 선배가 바다가 보고 싶어서 그래!”
“그래요, 그럼"
“잠깐 하루만 다녀와요.”
“그래….”
수현은 나경의 갑작스러운 모습이 이상했지만, 나경 선배의 말이라면 수현은 언제나 잘 들어주었다.
나경은 오늘 여행을 수현과의 마지막이 되리라 생각했다.
나경은 내일 다른 곳으로 떠난다..
나경은 아버지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떠나기로 했다.
나경의 아버지는 일본 도쿄대학을 졸업했다.
일본 문부성 장학금을 받고 도쿄대학을 나온 나경의 아버지는 나경도 도쿄로 떠나기를 바라고 있었다. 나경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했던 이야기와 행동들이 모두 위선으로 보일까 두려웠다.
하지만 수현에게는 말하고 싶었다.
여름이 끝나가는 9월의 해운대 바닷가에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수현과 나경은 철 지난 해운대와 동백섬을 말없이 걸었다. 수현은 약간 들떠 보이기는 했지만, 나경의 침묵이 낯설어서인지 쉽게 말을 하지 않았다.
“선배 무슨 일 있어요?”
“일은 아무 일도 없어….”
나경은 속마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말할 수 없었다. 나경은 내일 오전 나리타공항으로 떠난다. 대한항공 오후 4시 편이었다. 이제 한국을 떠나려면 24시간도 남지 않았다. 수현과 나경은 걸어서 해운대에서 광안리까지 걸었다.
부산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상쾌했다. 광안리와 해운대를 잇는 바닷가 도로를 따라 그들은 걸었다.
수영만의 가득한 컨테이너와 멀리 군부대시설들이 보였다.
수현아 너도 곧 군대 가야겠구나?
“그래야죠.”
“돈도 없는데 적당한 때 갔다 오려고요."
“선배는 가고 싶은 곳 없어요?”
“나… 어…”
나경은 마음을 들킨 것 같았다.
“우리 오늘 바다에 왔잖아….”
멀리 광안리 유원지의 바이킹 배가 보였다.
“선배 우리 저거 타 볼래요?”
“아…. 나는 좀 무서운데"
“재밌잖아요”
수현과 나경은 바이킹 배에 올라탔다.
“선배 제일 끝이 제일 무서운 것 알죠?”
“우리 저 끝에 앉아요?”
손님이라고는 나경과 수현 그리고 가족으로 보이는 서너 명뿐이었다.
“끼 이익…. 하고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나경은 수현의 손을 꼭 잡았다.
바이킹 배는 서서히 왕복 운동을 시작하더니 아래로 쏟아져 내리듯 떨어졌다.
아… 억… 나경은 소리를 질렀다,
그럴 때마다 수현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수현은 이 정도로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태연해 보였다.
수현은 나경이 자기 손을 꼭 쥐고 있다는 사실이 기분이 좋았다.
나경은 거의 죽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선배 멀리 보지 말고 눈감고 고개를 숙이고 아래를 보세요.”
“그럼 좀 나아요.”
나경은 기계가 멈추자 살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내려왔다.
어느새 어두워지기 시작한 광안리 바닷가엔 삼삼오오 모여 술잔을
기울이거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
수현과 나경은 광안리 앞으로 길게 뻗은 도로를 걸었다. 청새치 모양의 간판이 걸려 있는 술집이 보이자 나경과 수현은 말없이 그 술집 안으로 쓰러지듯 들어갔다. 술집 벽면에는 커다란 청새치를 잡아 올린 사진이 보였다. 수현은 “노인과 바다"를 생각했다. 노인인 잡은 것이 청새치였을 것이라고 수현은 생각했다.
헤밍웨이는 소설을 쓰는 것은 깨어 있으면서도 꿈을 꾸는 것이라고 했었다. 수현은 항상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가능하면 많은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꿈, 가난 때문에 꿈을 포기하는 사람이 없는 나라, 돈 때문에 비겁하게 고개 숙이지 않아도 되는 세상, 자유나 민주 같은 것을 위해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수현은 항상 꿈꾸고 있었다.
이것은 그냥 꿈인 것일까?
나경은 내일 비행기에 타려면 몇 시에 부산에서 서울로 가야 하는지를 계산했다.
‘오늘은 떠나야 해" 아니면 늦을 거야. 나경은 입에서 맴돌기만 한 말을 꺼내려 다가 맥주와 함께 삼켰다.
수현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나경은 수현이 좋았다. 하지만 일본에서 공부를 마치려면 4년이 걸릴지 5년이 걸릴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만큼 허망한 것은 없다고 나경은 생각했다.
해야 하는 말은 속으로 깊어가고, 하지 않아도 되는 말들은 허공에 맴돌았다.
테이블 위로 술병이 하나씩 하나씩 늘어나고, 먹지도 않은 감자튀김은 눅눅하게 식어갔다.
“영업시간이 끝났는데요?” 식당 종업원의 말을 듣고 시계를 보니 벌써 1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술집에 나오자 광안리 바닷물이 방파제 바로 앞까지 와있었다. 철썩철썩~~~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나경은 이제 이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안리 바다에는 술을 먹는 사람들이 술집에 들어갈 때 보다 많아 보였다.
“자~떠나자 고래 잡으러~~”
나경과 수현은 적당히 취했다고 생각했다.
나경은 모텔 앞에 멈췄다.
수현아 우리 많이 취했다. 우리 여기 들어가서 잠시 쉬자….
수현은 다른 말을 잠깐 생각했지만, 나경이 이끄는 데로 모텔 안으로 들어갔다.
“304호입니다,”
엘리베이터 계단에서 수현과 나경은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문이 열리고 딩동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3층 버튼은 나경이 눌렀다.
나경이 모텔 키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수현아 씻어" 네…. 수현은 욕실로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하나…. “
수현이 나오자 나경이 들어갔다.
수현은 침대 밑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웠다,
나경 선배가 나오기 전에 잠들자고 생각했다.
나경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수현은 잠자는 척했다.
“벌써 잠들었나….” 아직 말을 하지 못했는데....
나경은 잠든 수현의 얼굴을 바라봤다.
고등학교 때 수현의 얼굴이 떠올라
지금 모텔에 함께 있는 둘의 모습이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수현을 만나지 말아야 했어….
그랬다면 수현이 이 학교에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고 학생운동을 하지 않았을 것인데….
나경은 그때 일이 후회되었다.
나경의 침대에 누웠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수현아.라고 이름을 불렀지만, 수현은 잠든 척했다.
수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수현은 모른 척했다.
잠든 사람을 깨워도 잠든 척하는 사람을 깨우지 못한다고 했다.
“깊이 잠들었구나…. 수현아! 나…. 내일 떠나…. 나를 잊어줘"
나경은 이야기했다. 이렇게라도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수현은 나경이 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구나. 나경 선배는 내일 떠나는구나….
나경은 수현이 잠든 바닥에 자리를 폈다.
수현 옆에 나란히 누웠다. 수현은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수현은 손을 잡아 나경은 자신의 가슴 위로 옮겼다.
수현은 나경이 하는 대로 있었다.
나경 선배 잘 떠나요. 수현은 속으로 말하며 고개를 돌려 손을 뺐다.
나경은 수현 옆에서 밤을 새웠다.
새벽이 오자 나경은 말없이 모텔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인천에서 나리타 공항으로 나경은 먼 길을 떠났다.
수현도 잠을 자지 않았다.
나경을 붙잡고 싶은 마음과 그냥 있어야 한다는 마음 그리고 나경을 안고 싶은 마음과 그러면 안 된다는 마음이 그를 밤새 괴롭혔다.
빨리 새벽이 오기만을 수현은 기다렸다.
모텔 창문 커튼 사이로 희미한 새벽빛이 수현의 머리를 비추었다.
나경이 조용히 모텔을 빠져나가는 것을 수현은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미래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경에게 부담을 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수현은 88담배에 꺼냈다. 모텔방의 라이터를 찾아 불을 붙였다.
휴우……. 수현은 담배를 깊게 빨더니 입안에 한참을 담고 있다 후하고 뱉었다.
하얀 담배 연기가 나경처럼 흩어져 사라졌다.
나경이 떠나자 수현은 새벽 바다를 걸었다.
밤을 지새운 사람들이 해장술을 먹고 있었다.
떠난 나경이 벌써 그리웠다. 붙잡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더욱 그를 비참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