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빛에 환상이 일렁이면, 나 못다한 숨을 멈추리.
깊은 밤. 당신은 노래를 부르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대 목소리는 밤을 닮아 지나는 이들의 귀에 파고든다고. 그리하여 소리가 갈 수 있는 곳 그 너머까지 가 닿을 수 있다고. 비파 소리 시름에 잠길 때면 난 너를 품에 감춰 나지막이 속삭였다. 노래는 너의 업이 아니지. 돌아갈 수 없는 나날을 그리며 소리를 잣는 너를 그 누가 알아줄까. 네 과거는 황량하고, 미래는 아득하다. 나는 너의 현재를 쥐었지만 네 삶은 이곳이 아닌 어딘가. 그래. 노래가 닿는 그곳에서 영원히 유랑한다.
사랑한다. 너의 미지를. 너의 위태로운 실체와 향 없이 흩어지는 체취를. 내 사랑을 고백할 적 네 눈에 비친 공허를 기억한다. 너는 웃었다. 웃으며 감사를 말하고, 의례적인 말을 입 밖에 내며, 사모할 수 없는 연정과 나를 닮은 누군가의 마지막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 또 다른 누군가의 입을 타고 전해 내릴 구전이자 경고가 될 거라고. 너는 포기를 종용하고 나는 지속을 말한다. 이 밤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에 채울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낱자로 돌려 그 흔적을 너에게 새긴다.
네 작은 일부라도 내 것으로 할 수 있다면.
네 목소리마저 온전히 내 품에 감출 수 있다면.
비극적 서사를 남긴 숱한 연인을 떠올린다. 하나가 죽고, 하나가 떠나고, 하나가 어긋나고, 하나가 모자라 마주하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 그들의 종말. 설화가 되어 전해질 아름다운 우리의, 나의 사랑 이야기. 나는 병 하나에 그들의 애정, 사랑, 증오, 원망, 유예, 강렬한 첫 만남과 오붓한 시선을 함께 담아 네게 잔을 건넨다. 그녀의 붉은 눈. 홍등을 닮아 일렁이는 그대의 붉은 시선. 언제나 나를 불사르게 하는. 아름다운 그대여. 정염에 취한 내가 그대 눈에 비치고 그녀는 처음 만나 고백을 들은 이처럼 또르르, 시선을 감춘다. 그녀의 유려한 손이 비파를 향한다. 현이 울리면. 여느 때와 같은 노래가 이어지겠지. 그리고 우리는 함께 긴 잠에 들 것이다. 상처투성이 굳은 손마디를 감추어 어느 흔적 하나 내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너는 온전히 내 것이 될 테니.
밤은 한없이 깊어 가고. 네 노래는. 끊어질듯 위태로운 네 노래는 오래도록 살아남아 내게 말을 건네나니.
기대로 부풀었던 내 마음은. 한낱 필부의 꿈을 버려 비극과 최후의 연인을 상상하던 나는. 문득 네 노래에 정신이 일어 환상을 흩어낸다. 이 정념, 이 환락이 거짓이어도 네게 담았던 첫 마음은. 그것은 분명 사랑이었다고. 전할 수 있을까, 새벽놀을 그리며 소리를 잇는 너에게.
나는 너의 가장 안락한 피난처가 되고 싶었다. 너를 품에 안으면 네 노래가 담겨, 과거와 미래를 방랑하는 네가 이곳에 머물러 우리의 시간을 함께하길 바랐다. 홍등빛 염을 품은 네 눈을 사랑했다. 불안하고 위태로워 언제든 어느 곳으로 떠나버릴 수 있다 말하는. 매인 이 곳을 감히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한 너를 사랑한다.
이제 내가 너를 품을 수 없음을 안다. 나의 작은 한계를 안다. 널리 퍼질 너의 소리를 안다.
언제고 너는 소리보다 먼 곳에 가 닿을 수 있었지. 노래보다 멀리. 사랑보다 깊이.
그러나 이 작은 품으로 너를 담고자 한
이 마음의 시작은 분명 사랑이었으니.
추락하는 내 마음을 밭잡아 주오. 외마디 구걸을 욀 체면조차 이제는 옛것이니. 나는 너의 소리를 들어, 이 밤을 영원한 나의 숨으로 만들고자 한다. 너를 향해 건넸던 질척한 이 마음. 이 과오. 이 미련을. 내 안에 털어 네게 잊을 수 없는 하룻밤 충격으로 남고자 한다. 기억해 다오. 먼 날이 지난 어느 시간에. 네 소리가 멈추려 할 때에. 홀연히 나타나 네 꿈을 헤집어 오늘 이 장면을 보이고 말 것이니. 사랑하는 이여. 황홀한 그대여. 나는 그대의 노래에 잠겨 죽을 것이다. 비극도 애정도 아닌. 오직 그것만이 내게 안식을 주기에. 줄 수 있기에. 끝없이 그대를 탐한 이의 말로를 모두에게 알릴 것이다. 그리하여 네게 자유를, 한 뼘 틈을 띄운 자유를 선물할 것이다.
깊은 밤.
당신은 끝없는 노래를 부르고
나는 선율에 잠겨 눈을 감는다.
이 이야기는 어느 기루의 여인을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현실에 발 디딜 재력은 있지만 마음을 줄 곳도, 기댈 곳도 없이 흔들리는 삶을 이어나갔지요.
그러던 어느 날. 밤거리를 지날 적 그는 작은 노래를 듣습니다. 소리를 따라 들어간 곳에서 자신과 닮은 한 여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녀는 기루에 매인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언제든 죽음으로 떠날 각오가 있었기에, 역설적으로 가장 자유롭고 가장 불확실한 존재였지요.
남자는 홀연한 그녀를 깊이 사랑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진정 사랑이었을까요. 혹 자신을 향한 연민은 아니었을까요.
남자는 모든 것을 빌어 그녀에게 사랑을 간청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그를 향하지 않습니다. 연정의 말을 건네면 한 순간 사랑에 취해 비극을 맞이한 숱한 연인들의 이야기를 돌려줄 뿐이었지요.
남자는 그녀를 더욱 깊이 원하게 됩니다. 그의 상상 속에서 그녀는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었고, 오붓한 밤을 함께하는 사이었지요. 망상의 끝에 그는 작은 병을 들고 그녀를 찾아갑니다. 여느 때처럼 노래를 준비하던 그녀에게 남자는 병에 든 독을 꺼내 잔에 나누며, 함께 비극적 연인이 되어 이 삶을 떠나자 말합니다.
그녀는 말이 없습니다. 대답 없이 비파를 쥐고, 끝없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지요. 그녀는 알고 있습니다. 남자는 그녀의 노래를 사랑하고. 그것만은 그가 자신을 알기 전부터 있던 온전한 진실이며. 노래를 하는 동안 그는 자신의 입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긴 시간 이어지는 연주에 밤은 깊어만 갑니다. 곡조는 조심스런 문장이 되어 의식에 말을 건넵니다. 그리고 문득, 그는 환상에서 깨어납니다. 그녀는 살아서 노래를 계속하길 원하고, 자신은 그녀의 소리를 막고자 한 한낱 소동에 불과했음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그는 생각합니다. 이제껏 그녀를 향해 내뱉은 사랑, 집착. 두 가지 한 데 섞여 혼탕하지만 그녀의 노래를 사랑한 자신의 마음만은 진심이었다고. 그리고 바라건대, 그녀가 디디고 선 위태로운 난간이 한 뼘이라도 더 넓어져 그녀가 조금이라도 자유롭기를 소망한다고. 왜냐하면, 그 약간의 안정이야말로 그가 평생 바라 온 것이기 때문에.
그는 생각합니다. 그녀가 말한 수많은 연인들의 비극적 최후를. 진실인지 거짓인지 모를 이야기 속 연인이 실존했다면. 그들을 두고 사람들은 ‘아름답다’ 말하며 눈물 흘렸을까요? 아니. 외려 꺼림칙하게 여겼겠지요.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는 동화지만, 남은 시체를 치우고 소문을 잠재우는 것은 현실이니까요.
남자는 그녀의 소문이 되려 합니다. 그녀의 노래를 사랑한 끝에 스스로 목 매어 죽은 혼령이 되려 합니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자유를, 한 뼘 크기만 한 여유를, 조금 더 편히 세상에 머무를 근간이 되어주려 합니다.
그녀를 향해 건넨 잔을 그가 다시 들어 올립니다. 그녀의 노래를, 목소리를 빼앗겠다니. 이제 와 생각해 보면 이는 처음부터 불가능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깊어 가는 밤, 끝없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그는 마지막 잠에 듭니다.
꿈의 끝에는 분명 행복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의 노래가 그의 곁을 지킬 테니까요.
<후기>
붉은 등이 총총 매달린 거리와 선명한 붉은 눈이 떠올라 홍등이라는 단어를 썼지만
그녀는 무협식으로 표현하자면 청루靑樓에 속한, 한국식으로 말하자면 예기藝妓에 가깝겠지요.
가능한 그녀를 고고하게, 존엄하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그것만큼은 후기에 명확히 하고 싶네요.
그녀는 그를 사랑했을까요?
정말 한 톨 정염도 그 마음에 없었을까요.
한마디 말없이 그를 돌려 세운 그녀가, 외로운 그의 모습에서 자신을 찾지 못했을까요.
남은 이야기는 청자의 몫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